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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여, 게토로 돌아가십시오.”
조광동 언론인  |  일리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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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0  06: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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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흑인 동네에서 장사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흑인 종업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왜, 자기를 채용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제 말에 “코리안은 흑인을 고용하지 않잖아요?”하고 되물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대부분의 시카고 한인 상인들이 흑인을 채용하지 않았고, 한인 상인들과 흑인 커뮤니티는 팽팽한 긴장과 갈등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흑인 동네는 권총을 차고 장사를 해야 할 만큼 위험했고, 도둑과 강도가 많았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흑인 강도의 총에 죽었고, 신문에는 “또 흑인 강도”란 제목이 빈번했습니다.

오랜 폐쇄 문화와 단일민족 사회에서 살아온 한인들은 타민족, 타인종에 대한 배타성과 차별의식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문화 의식을 가지고 이민 온 한인들에게 거칠고 험악한 흑인 동네 장사는 흑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편견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흑인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저 또한 많은 갈등을 느꼈습니다. 흑인을 차별하면 안 되고 흑인을 이해하고 흑인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던 저는 물건을 도둑 맞고 강도 위험이 있는 흑인가에서 장사하면서 생각과 현실의 괴리에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의 비애와 아픔에 공감하면서 그들을 껴안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빈손으로 시작한 이민 생활인데, 그래도 우리가 생활을 꾸려 가고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것은 흑인 고객 때문이 아니겠는가; 흑인 동네에 도둑이 없고 강도가 없다면 체인 스토어 기업이 점령하지 우리의 구멍가게에 차례가 오겠는가; 코리안이 이민 올 수 있었던 것도 흑인들의 인권 투쟁 덕분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가난했던 시절, 소매치기와 도둑이 들끓었던 슬픈 시절을 겪지 않았는가; 가난하고 못 배우고 범죄가 일상인 게토에서 반듯한 인간이 나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흑인 노예에 대한 죄악과 차별에 대한 대가를 미국이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흑인들을 변호했습니다.

1980년대 초, 흑인 헤롤드 워싱턴이 시카고 시장에 출마했을 때, 같은 민주당 백인들까지 흑인 후보에게 등을 돌리는 인종차별 시대에 한인 상인들은 워싱턴 후보를 위해 선거 모금 파티를 했고, 한국인들은 성공한 이민자라는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가 흑인을 비하하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이라는 충고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성공적인 이민자의 긍지를 애써 감추면서 흑인과 친구가 되려고 했습니다.

1990년대 초, 흑인들이 뉴욕의 한인 청과상 레드 애플을 1년 반 동안 고사시키는 보이콧 운동을 할 때도, 시카고 불스가 농구 챔피언이 되었을 때 흑인들이 한인 가게에 불을 지르고 약탈 축제를 했을 때에도, LA 폭동으로 수천 개의 한인 가게가 불타고 약탈당하면서 잿더미가 될 때에도, 저는 그래도 우리가 흑인을 껴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과상 주인의 피 마르는 사투에 가슴 저리고, 불스 난동으로 피해 입은 한인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폭동으로 불타는 가게 앞에서 울부짖는 LA 동포들과 함께 울면서도, 그래도 흑인들을 이해하자고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아픔과 분노를 억누르며, 외로움과 비애와 억울함에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흑인 동네에 기부금을 전하고, 푸드 바스켓을 기증하면서 흑인의 이웃으로 동참했습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쉬는 날도 없이 하루 열 다섯, 열 여섯 시간 일하면서 열심히 돈 번 것이 죄진 것처럼 되고, 흑인들 피 빨아 먹는 흡혈귀라 매도되어도, 우리는 항변도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흑인들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흑인 강도에게 숨질 때 아무도 분노해 주지 않고,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끼리 울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흑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그들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흑인에 대한 저의 이해와 연대감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인들은 변했지만 흑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의 권리 요구는 더 커졌고, 불만과 불평은 더 커졌고, 그들의 권리의식은 강해지고, 범죄까지 정당화시키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모든 것이 과거 탓이었고, 차별 탓이었습니다.

흑인들에 대한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가 지탄받고 처벌받아야 하고, 이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이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목을 졸라 죽인 것은 끔찍한 공권력 살인입니다. 항의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항의 시위가 폭동과 약탈로 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폭동과 약탈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과 관계없습니다.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방화와 약탈이 처음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약탈과 파괴의 규모가 엄청난 것이 놀랍습니다. 더욱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파괴와 약탈을 경찰이 팔짱 끼고 방관했다는 것이고, 시장과 주지사들이 파괴와 약탈을 묵인 방조하듯 했다는 것이고, 파괴와 약탈을 정당화시키는 지도자들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불법과 광란이 미국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미국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고, 그런 나라일 수 없습니다. 이런 광기와 야만과 불법은 미국의 얼굴이 아닙니다. 어쩌다 미국이 이렇게 추락하고 있는지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미국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이런 추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만 억울하고,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만 중요하지, 약탈과 방화에 이민자의 눈물과 땀이 잿더미 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약탈과 파괴, 방화가 미국의 근간을 뒤흔들고, 공권력이 마비되어 나라가 망가지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미국을 허물고 미국을 파괴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흑인 생명이 소중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합니다. 왜 경찰이 흑인들에게만 잔혹행위를 하고, 흑인들만 죽이느냐고 항의하지만, 흑인들만 골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인이나 백인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소수인 것은 경찰이 동양인과 백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경찰에게 저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 수갑에 순순히 응하면 경찰은 죽이지 않습니다. 경찰이 흑인을 골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주장을 인종주의라고 비난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비뚤어진 인종주의자이거나 인종주의를 납치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입니다. 인종주의가 왜곡되고 오용되고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종주의는 일방적이었지만 오늘의 인종주의는 상호적입니다.

흑인들 가운데 약탈자들이 있는 것처럼 백인 경찰 가운데도 잔인하고 차별적인 경찰이 있습니다. 모든 흑인이 도둑이고 약탈범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경찰이 흑인을 차별하고 잔혹한 것이 아닙니다. 소수에 불과합니다. 소수의 나쁜 백인 경찰 때문에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경찰을 매도하는 것은 일부 나쁜 흑인들 때문에 흑인을 모두 폭도로 모는 것과 같습니다. 경찰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쥐 잡기 위해 장독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과 어리석은 약탈이 정당화된다면 “블랙 라이브스 매터”의 정당성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경찰 문화가 달라져야 하는 것처럼, 흑인 문화도 달라져야 합니다. 흑인 스스로가 깨우치고 변하지 않으면 흑인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제도와 법을 뜯어고쳐도 흑인들의 거친 문화가 순화되지 않으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차별의식을 없앨 수 없고, 흑인들은 과거의 치욕과 분노와 한의 수렁 속에 살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저는 지금, 반 세기 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절규를 영감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유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원망과 증오의 잔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오늘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고 외치는 사람들, 선동과 파괴를 부추키는 앤티파(Antifa) 운동가들은 숙연히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킹 목사는 다시 외칩니다. “저는 언젠가 저의 어린 네 자녀들이 피부 빛깔이 아니라 ‘캐릭터’(Character)로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은 킹 목사가 꿈꾸던 그날의 현장입니다. 과거의 미국은 차별의 나라였지만, 오늘의 미국은, 제도상으로는 더 이상 차별의 나라가 아닙니다. 능력과 품격으로 평가받는, 킹 목사가 말한 ‘캐릭터’가 평가받는 나라입니다.

물론 오늘의 미국에 모순과 불합리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아직 ‘캐릭터’가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의 나라이기에 미국에 이민 오려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습니다. 주어진 것을 모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에 불만이고, 끝없이 불평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질 않고 미국의 축을 흔들고 있습니다.

지금 Black Lives Matter를 외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흑인들은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오늘도 시카고 흑인 동네에서는 흑인 형제들 손에 흑인 형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비극의 고리를 끊을 것입니까? 흑인이 자각하고, 흑인 스스로가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오늘의 흑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흑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미국의 장래는 어둡습니다. 흑인이 절망의 수렁으로 추락하면 미국은 함께 공멸로 갈 것입니다.

다시, 킹 목사의 호소를 듣습니다. 고난 받는 민권운동가들을 향해 “형제들이여, 게토와 슬럼으로 돌아가십시오.”를 외쳤던 킹 목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의 킹 목사는 흑인 엘리트와 지도자, 운동가, 정치인들을 향해 외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형제들이 사는 슬럼과 게토로 돌아가십시오. 가서 형제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꿈을 주십시오.”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흑인 게토와 슬럼으로 가십시오. 가서, Black Lives Matter 깃발을 흑인 가슴에 휘날리게 하십시오. 흑인 스스로가 일어서서 흑인의 존엄과 긍지의 열망을 불붙게 하십시오. 이 감동의 불길이 흑인을 변화시키고, 차별주의를 무릎 꿇게 하고,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분노에 찬 주먹과 함성만으로는 차별의 고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흑인은 사랑받고 존경받는 ‘캐릭터’를 가진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흑인도 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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