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경 그리고 분별(20)

감정과 분별 8

2011년, 과테말라에 내려간 나는 지독한 영적 고독을 체험하게 되었다. 현지의 극심하고 처절한 상황에 대해서 번민했고, 그러는 가운데 소명을 찾았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통해 확증 받았고, 드디어 과테말라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이러한 과정이 너무나 행복했다. 소명을 찾은 자들, 백이면 백에게 다 물어보라. 기분이 어떠냐고? 날아갈 것만 같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할 일을 주셨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기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너무 기뻐서 간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만 모이면 간증했다. 어떻게 소명을 찾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미션에 동참하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조금 더 나갔다. 확신에 찬 나머지, 기업에서 사업보고서 발표하듯이 간증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할 것입니다. 모든 계획이 조직적인 모습을 갖췄다. 발전 3단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후원자를 어떻게 모을 것입니다. 이런 미션의 철학 하에 진행하겠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이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꽝꽝!

사람들은 신중하게 들어줬고 격려해 줬다. 그리고 이 일을 시작했다. 덕택에 신학교 졸업식 때, 가장 선교에 열심인 자에게 수여하는 ‘미션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이제는 일과 미션의 병행이 아니라 미션에만 전념하고 싶어졌다. 선교사가 되기로 하고 내가 속한 메노나이트 교단에 신청서를 접수했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보내만 주시오!” 비록 미션의 주 포커스는 과테말라나 중미의 나라들이었으나, 전임 선교사로서의 마음을 새롭게 다지면서 지역이나 선호에 이끌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교단에 의해 결정된 곳이 중국이다.

그곳이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란다. 그런데 얼마나 가 있을 건가? 내 마음 속에는 또 10년이란 숫자가 왔다. “한 번 나가면 최소 10년은 해야지!” 장기 선교사!

이런 과정에서 멘토 목사님과 상의를 했다. 왜 가는가, 어떻게 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처음 당신이 과테말라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최소 10년은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지금은 중국인가?” 그녀의 질문은 나의 머리를 때렸다. 

그 10년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소명을 받았던 것까지 좋았다. 그리고 과테말라의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도 좋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왜 하필 10년 간 이 일을 위해 헌신한다고 말해 버린 걸까? 존경하는 이재철 목사님께서 10년 간만 ‘주님의 교회’를 섬기겠다고 하고 정확히 약속을 지킨 것에 감동한 그 10년인가? 아니면 영적 스승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삶에서 보여준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최소 10년 이상 하는 데서 감동받은 것인가? (그의 자서전인 『유진 피터슨』을 보면 그가 얼마나 끈덕진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2000년에 북미로 오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10년은 해야지,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생긴 것 같다. 늘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살아온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의 의미였을까? 모쪼록 지난 십수 년 간 한 달에 3, 4만원 내는 국제기아대책기구 헌금에서부터 하다못해 주부들을 위한 독서 클럽의 운영에 이르기까지 늘 입에 담고 살았던 말은, 한 번 하면 최소 10년은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과테말라 프로젝트 소명을 받고 일을 시작할 때 그 10년에 대해서 분별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10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10년이었다. 문제는 내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곧 나는 이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아냐,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나의 헌신이지, 과테말라는 아니지 않은가? 어디든 상관없지 않은가? 과테말라는 나의 헌신을 이끌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였지 나의 미션이 반드시 과테말라에서 끝나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중국에 간다고 해서 과테말라 프로젝트에서 손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일할 준비가 된 자 아닌가? 나는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변명이었다.

내가 최소 10년을 과테말라 프로젝트에 헌신하겠다고 공표할 당시에 나는 이그나티우스의 『영신수련』을 몰랐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론』에 대해서도 몰랐고, 따라서 분별의 구체적인 지침들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았다. 영적인 위로나 평화나 기쁨의 가운데에 있다고 함부로 ‘약속’이나‘ 각오’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때가 마귀가 틈타는 때라는 것을 몰랐다. 에드워즈가 말한 것처럼, “성령을 받았다고 흥분하고 바닥 위를 구르고 교회 활동에 열심이고 사랑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함부로 단정하지 마라.”는 경고를 무시했다. 그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위로를 받아, 그 기쁨이 날아갈 듯했다. 그래서 감정대로 한 것이고, 사업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내게 주신 평화나 기쁨의 감정들을 되짚어본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나 자유 얻는’ 기쁜 소식은 세상에 널리 전하는 게 맞다고 쉽게 생각했다. 물론 그래야 한다. 하지만 미래의 일에 대한 약속이나 각오는 하지 말아야 했다. 당시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는 바울의 충고가 귀에 안 들어왔다. ‘나는 그저 심는 자입니다.’라는 고백만 필요했다. 얼마나 오래 할 건 지는 주님만 아시는 것이었다. 그러니 10년은 박준형이라는 인간이 세워놓은 기준이었다.

이런 와중에 아내의 발병으로 중국행을 놓치고 9년째 과테말라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10년을 채워 주실 생각인가?’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시종이 일관된다(성령의 열매는 변덕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들은 시끄럽지 않고 조용하며 혼란스럽지 않고 평온하다. 우리를 거짓 맹세하게 하지 않게 하고 되려 인내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순도 100%의 마음의 평화나 기쁨은 ‘사전에 어떤 이유도 없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 잉글리쉬 신부가 그의 책 『영적인 자유함(Spiritual Freedom)』에서 인용한 프랑수아 샤못의 말과 같이, “성령을 받게 되면 혼동이 오곤 하는 것이다.” ‘어, 왜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랬듯이, 그래서 그들에게는 두려운 감정이 먼저 왔던 것이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

하지만 이런 혼동과 두려움은 곧 사라진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로부터 곧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너그러워진다. 방금 전까지 분노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조차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찾아온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은 오래간다. 그래서 우리들의 본성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 안에 평화와 기쁨이 영구히 함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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