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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러 가는 거룩한 길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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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24  03: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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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에드워드의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를 읽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의 글 하나가 머리에 남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를 짊어졌던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만 예비된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이라는 말을 구원이라고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며칠 전 한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할 때도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저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제게는 분명 기회가 있고 그 과정에 있지만, 그것이 확정되는 것은 죽은 후에 있을 심판 때입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목사님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걱정이 됩니다. 다른 사람 걱정이 아니라 제 자신에 대한 걱정입니다. 에드워드의 말처럼 과연 제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가를 돌아볼 때 영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가난의 길을 택했고, 또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잘 읽어 보면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날마다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날마다'가 끝나야, 다시 말해 우리가 죽어야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이런 생각이 의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의 근거로 제시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잘 묵상해 보면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확신이 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성서에 붉은 글로 표시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참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말씀이 아니라 목사님의 말을 듣습니다. 아멘을 크게 외친 후에는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큰 믿음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제겐 그런 큰 믿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것이 큰 믿음인가를. 그게 맹신이나 광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으십시오. 그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입니다.

면죄부는 구원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에만 그랬을까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요.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장사였습니다.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첩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그것을 면죄부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사업을 확장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면죄부는 고육지책이 아니라 효자상품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선포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 가운데 누가 감히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에서 에드워드는 바울이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꽂았다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곳에 꽂혀 있는 깃발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는 아나뱁티스트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는 결코 바울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그것을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최선이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의 정상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 정상에서 보여준 믿음도, 바울이 날마다 죽으며 보여준 믿음도, 베드로가 이름 없이 사라져 이끌리는 사람이 된 것도 모두가 믿음의 정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험의 기회에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 모두 합격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판단 기준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저의 성서 이해이자 하나님 나라 이해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합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되어 지체들이 복음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방패막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희생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유무상통하는 경제공동체로서의 역할은 기본입니다.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1700년 동안 한 일이 십자가를 골방에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골동품이 되었 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 하셔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그리스도 되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부활을 향해 갈 수 있는 거룩한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을까요. 여러분이 가시고 있는 길이 부디 십자가를 지러 가는 거룩한 길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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