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췌장암과의 6개월 사투 끝에 지난 7월 17일 별세했다. 인권의 아이콘이었던 그의 나이 80세였다.

그는 1986년 11월 의원으로 선출되어, 17년 동안 조지아 5지구의 미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그는 50개 이상의 명예 학위를 받았고, 2011년 오바마 버락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물납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노예로 태어났던 증조부와 함께 주일을 보냈다. 루이스가 아기였을 때, 제시 손톤이란 이름을 가진 닭 농장 매니저가 도로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서 린치를 당했다. 손톤을 쫓아간 폭도는 그에게 돌을 던지고 총을 쏘았으며 그의 시신을 늪에 유기했다.

루이스의 꿈은 설교자였다. 그는 내쉬빌에 위치한 미국침례교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라디오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설교를 들은 뒤, 하나님께서 인권 운동에 동참하라고 자신을 부르신다고 느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루이스는 “인종적으로 분리된 화장실, 호텔, 공원, 수영장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이등 시민이라는 또 다른 모욕에 항거하여 일어섰다. 그럴 때마다 백인들을 그를 때렸고 침을 뱉었고 담뱃불로 지졌다.”고 회상했다.

1961년 프리덤 라이드 운동이 벌어진 동안, 루이스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에서 수백 명의 백인들 공격을 받아 흘린 자신의 피웅덩이 속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라고 타임스는 보도했다. “그는 셀수없이 많은 날들을 카운티 교도소에서 지냈고, 미시시피 주의 가장 악명 높은 파치맨 교도소에 31일 동안 갇혀 있었다.”

1963년 워싱턴 행진에서 루이스는 최연소 기조 연설가였다. 1965년 3월 7일에는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흑인 투표권을 요구하며 600명 행진 대열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경찰들과 맞닥뜨렸고, 야경봉에 맞아 두개골이 부서지는 고통을 겪었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그 사건은 “피의 일요일”로 알려졌다.

20대 초반에 루이스는 “구속적 고통”의 원리에 따른 비폭력 시위를 수용했다. 그는 회고록 『Walking with the Wind』에서 ‘고통의 본질 속에는 해방과 정화와 구속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고통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변화시킨다. 고통은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힘, 올바르고 도덕적인 힘, 인간 양심의 기본인 참 진리의 힘으로 우리와 이웃을 이끌어 준다.'라고 루이스는 덧붙였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는 공격자도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희생자라는 신념이 들어 있다. 그러한 신념은 '당신에게 침을 뱉고 담뱃불로 당신의 목을 지지고 당신을 저주할지라도' 가해자를 용서할 것을 요구한다.

루이스는 자신의 인생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운동 초기에, 나는 예수의 가르침, 사랑의 방법, 비폭력의 방법,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받아들였다. 증오는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다... 나는 그 길로 가고 싶지 않다. 나는 너무 많은 증오와 폭력을 보았다. 사랑이 최선의 길이라는 걸 안다.'

흑인 사회를 망가뜨리는 동성혼, 종교의 자유, 특히 낙태와 같은 도덕적 이슈에서 루이스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구속적 고통”이라는 그의 믿음에는 동의한다.

올바른 일이 일반적인 호응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용기를 내어 희생적인 길을 갈 것인지, 이기적으로 비겁함의 나락에 떨어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 선택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주 이런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용기 있는 신앙을 자주 요구하는 데서 드러난다.(신 31:6; 수 1:9; 대상 28:20; 대하 32:7; 시 16:8; 고전 16:13; 엡 6:10; 빌 1:28 참고).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은 강력하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라”(엡 6:10).

하지만 이것을 알자. 당신이 “구속적 고통”을 택할 때, 당신의 용기와 모범이 세상을 변화할 수 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투표권 법안이 바로 통과되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된 8일 뒤인 8월 6일에 서명했다.

피의 일요일 50주년에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루이스 하원의원과 함께 셀마의 에드문드 페투스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그날 50년 전 구타당했던 루이스는 구속적 고통의 변화의 힘을 보여 주었다.

루이스가 사망한 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는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의 약속을 따라 살고자 했다.”고 말했다. 미치 코넬 상원 원내대표는 “진보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존 루이스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정의를 구했기에, 위대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정의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미국 영웅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설교자의 길을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냐는 질문에 루이스는 “지금 나의 설교단은 더욱 커졌다. 나는 날마다 설교한다.”라고 대답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이다.

(* 편집자 주 -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7월20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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