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분별 9

완전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은 우리 인간들의 어떤 수고와도 상관없이 주어진다. 그래서 ‘그레이스, 은혜’라고 한다. 그것도 ‘어메이징’ 그레이스! 사십일 작정 기도를 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다. 헌금을 많이 냈다. 직장을 포기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 사업이 번창했다. 자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인간의 노력과 공로의 결과로 주어지는 성령이고 물질적인 복은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악한 영은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과 노력을 이용해서 올 수 있다. 우리들의 평화와 기쁨과 같은 위로의 감정들, 성령의 오심은 인간들이 측량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 속한다.

토마스 그린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들은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듯이 온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령의 오고 가심이 좌지우지된다면, 이때가 다시 말하지만 사탄이 틈타는 때이다. 성령을 부리는 자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되는 하극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바라는 것 아닐까? 우리의 관심 대상을 주님에게서 다른 것으로 옮기는 것,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는 것,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러한 내면의 검증 작업을 마치 중세의 종교 재판 하듯이 지나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의심하는 남에게도 마찬가지다. ‘검토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단정한 소크라테스처럼 그렇게 극단으로 갈 필요는 없다. 대신 주님이 주신 성품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런 내면의 성찰과 검증의 과정을 진행하면 된다.

찬찬히 인내하며 자신의(혹 남의) 감정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때 시편 139편은 우리의 길잡이가 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그러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사탄에게서, 악한 영에게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사탄이 주는 감정들은 늘 시작이 화려하고 그럴싸하나 그 끝은 지리멸렬하고 흐지부지하다. 그런 감정들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늘 ‘이유’나 ‘조건’이 붙어 있다. 

주님에게 사탄이 한 말을 생각해 보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사탄이 선한 영이라면, 조건 없이 그냥 줄 것이다. 예수님이 여리고의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실 때(눅 18:41-42) 조건이 있었나? 회심한 베드로가 성전 앞의 못 걷는 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행 3:6)라고 말한 것과 같이, 선한 영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분이다. 주님의 수많은 치유와 축사의 기적들이 조건을 달고 행해진 것인가? 주님이 묻는 유일한 조건은 “네가 낫기를 원하는가?”(요 5:6)이지, “네가 낫거든…”이 아니다.

‘네가 입만 다문다면……‘, ‘네가 나에게 착하게 굴면……‘, ‘네가 만일 나에게 투자한다면……’, 이런 은밀한 조건부 계약의 유혹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한 자들이 사탄의 자녀가 되었던가? 왜 이런 유혹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탄아 물러가라!”(마 4:10)라고 외치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 말의 위력을 모르는가?

물론 한 가지는 인정한다. 토마스 그린 신부의 말과 같이, “우리 인성의 원수인 악한 영은 우리를 넘어뜨리기로 마음먹으면 결코 실망하여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성숙하든 미성숙하든 늘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기가 죽어야 하는가? 이것을 모르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하면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온 세상의 악을 누르고 이미 승리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시련과 고난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그것들은 결코 우리가 감당할 만한 수준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감정이 어디서 왔건, 그 영향이 어떠하든 간에, 감정이 메말랐건 넘쳐났건, 거짓이건 진짜이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선한 인도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가지게 될 것이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최후 승리하실 것이고, 우리의 마음에 비교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다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때 주어지는 위로의 감정들은 지워지지 않고, 취소되지 않는 영원한 지복의 감정(bliss)들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기다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게으름’이라고 말한 믿음의 선조들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어떤 감정의 기복에도 함부로 들뜨거나 낙담하지 말고, 말을 아끼며, 오직 인내함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 131).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때까지, 우리 안에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끈덕지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사탄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며, 우리를 1초도 가만히 두지 않는 성급한 세상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가장 큰 겸손이다. 

C.S. 루이스가‘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은혜’라고 말했다면, 나는 ‘인내’라고 말한다. 은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역인 반면, 인내는 하늘 아래 있는 인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땅 위의 인간이고 내가 할 일은 오직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것뿐이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는 것”(시 37:7). 이게 지금까지 내가 터득한 최고의 분별의 지혜다. 그래도 여전히 초조한가? 이럴 때에는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눅 10:41~42). 이 한 가지가 뭔가만 생각하라! 그리고 이 한 가지만 '꼭' 붙들어라!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4:6~8,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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