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바울)의 삶에 대해 비교 연구하며, 여러 영적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의 하나는 진정한 영적 위대함에 대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 사람은 작은 자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큰 자가 되고자 했고, 한 사람은 스스로 큰 자로 시작했고, 큰 자로 여겼는데 나중에는 작은 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왕이 된 후 평생을 다윗의 핍박자로, 한 사람은 교회의 핍박자에서 복음의 증거자로, 그리고 도리어 복음을 증거하므로 평생을 핍박을 받는 자로 살았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은 후, 그들의 대조적인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준으로 영적으로 진정한 위대함의 길로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크신 하나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아 가는 사람은 자신이 전에는 큰 사람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제일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데서 점점 더 자신이 작은 자로 인식되어 간다. 거대한 건물 앞, 거대한 유적,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나 자신이 심히 작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그런데 갈수록 자신을 큰 자로 생각하거나 큰 자가 되고자 노력하고, 사람들 앞에서 큰 자로 여김 받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주보다 더 크고, 우주보다 더 넓고, 우주보다 더 높고, 우주보다 더 깊다. 단지 제한된 사고와 제한된 두뇌,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제한되고 한계적인 사람이 깨닫지 못할 따름이리라.

왜냐하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이 땅에 모든 영광을 버리고 오셔서 주신 은혜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피상적인 은혜가 넘쳐나고 있다. 은혜는 늘 말하지만 그 은혜의 깊이보다 피상적인 은혜, 겉으로 아름다운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감정적으로만 뜨거운, 그래서 금방 식어버리는 인스턴트 은혜…

교회는 작은 자들의 모임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너무나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은혜를 먹고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람이 높여질 공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큰 은혜를 먹는 사람은 틈만 나면, 혹은 조금의 환경만 주어지면, 어떻게 하든 자기 명함을 내밀지 못해 안달하는 추함에 자신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크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드러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삼상 10:21,2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 15:12).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3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성령님날마다 천박한 죄인의 영의 눈을 여사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달아 일생 지극히 작은 자로 이 크신 은혜만을 증거하는 도구 되게 도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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