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12-25

결승전 전날, 대학교 풋볼팀의 주전 선수 한 명이 출전 금지 통고를 받았습니다. 코치가 항의하자 학장은 문제의 선수가 시험 부정을 저질렀다고 말했습니다. 코치는 증거가 있느냐고 대들었습니다. 학장이 대답했습니다. “첫 아홉 문제 답안이 옆자리 학생과 똑같았단 말이요.” 코치가 말했습니다. “그 학생이 이 선수의 답안을 베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학장이 말했습니다. “그랬다면 그건 열 번째 답안이지요. 옆 학생의 답안이 ‘모르겠습니다.’인데, 선수의 답안은 ‘나도 모르겠습니다.’였으니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단 이 선물을 받으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값이 무엇입니까? 대답이 “모르겠습니다.”입니까? 아니면 “나도 모르겠습니다.”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예수님의 첫 설교입니다. 회개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참 생명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값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매일 살아야 할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고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 사랑의 빛 아래 살겠다면서, 실생활에 그것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심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나,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참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영혼을 풍요케 하는 은혜의 선물을 받길 원한다면, 그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본래 “마음을 바꾼다.”는 뜻인데 생활을 바꾼다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생명에 대한 마음을 바꾸면, 그 결과 생활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회개의 뜻으로 쓰이는 또 하나의 표현은, “방향을 돌린다.”는 것으로 신약에 20회 이상 나옵니다. 회개는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려면 영혼 구석구석을 살피는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쪽으로 향하기 위해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만화 장면입니다. 부부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남편의 표정이 근엄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등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완전 씨에게 제발 약점 한 가지만 주세요.”

완전 씨들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회개할 것 없는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완전 씨란 없습니다. 누구나 회개할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이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 아래 정직하게 서면 하나님의 손이 덮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손길에는 자비와 축복과 용서가 가득합니다. 그 손을 받아들일 때, 새 생명의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제 과거는 우리를 좌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과거를 아주 없던 것처럼 여기시는 용서입니다. 인생의 새 장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가까워집니다. 깊어집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속죄의 날은 회개와 회복의 날입니다. 한 목사님이 낙심과 실의에 빠져 현관 계단에 서있는데, 구두 수선공이 지나가며 물었습니다. “수선할 것 있습니까?” 목사에게 그 말은 꼭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자기 문제의 근원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었고,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생활에 수선이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수선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새 생명의 선물을 참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참다운 생명, 완전한 생명을 누리는 다른 더 좋은 길을 나는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강요된 사랑”도 있을 수 없고, “강요된 회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모두 자원자들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빛 아래 행하겠다고 했으면,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직의 대가입니다.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평생 사랑의 봉사로 예수님을 따를 용의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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