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은사보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성령론(8)

성령론 공부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알려 주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은사보다 삶이다 

성령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입니다. 김요한 목사님은 『지렁이의 기도』라는 책에서 두 장로님의 방언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두 장로님은 모두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은 하루에 세 시간씩 방언으로 유창하게 기도한다고 자랑을 하는 분이었고, 다른 한 장로님은 방언이 투박하고 진척이 없어서 요즘은 방언기도를 거의 안 한다는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은 분이 이 두 장로님의 방언 기도를 통역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3시간씩 유창하게 방언 기도를 한다는 장로님의 방언에 대한 통변은 이러했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장로라는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긍휼이란 것은 눈꼽만큼도 없냐? 너보다 가난하고 볼품 없는 사람들을 얕잡아보니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아느냐?” 이분은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사랑이 없다고 성령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투박하게 한다던 장로님이 더듬거리면서 방언기도를 시작하는데, 의외의 통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구나. 네가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마음이 가득하니, 내가 너를 참으로 기뻐한단다.” 

이 이야기에는 깜짝 놀랄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유창한 방언 기도를 하는 분은 성령님께 야단을 맞고, 오히려 투박한 방언 기도를 하는 분이 성령님께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것은 은사보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안의 새로운 삶: 성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이 성령 충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기쁨과 자유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상태이지만,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령 충만은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4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세례의 중요한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입니다. 세례의 목적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합니까? 세례 때 임한 성령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성화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이 바로 “성화”입니다. 

칭의와 성화의 분리
     
그런데 우리는 성화에 대해서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 하시는 은혜”(칭의 justification, 롬 3:24)는 구원의 필수이지만,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은혜”(성화 sanctification, 롬 6:4)는 구원의 선택 사항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붙어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미 성화의 삶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거룩한 삶으로 이미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고전 3:16-17).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갈 5:25).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칭의와 성화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면, 교회의 위기가 극복되고 신앙의 위기 또한 극복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위기는 믿는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성령이 기뻐하시는 삶을 우리의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이 일종의 도덕적인 노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성화의 삶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짐처럼 느껴집니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말합니다. “성도들은 결코 성도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런 삶의 방식은 그저 성령의 선물로서 나타날 뿐입니다.”(『성령』) 성화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겔 36:26). 성령이 새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성령을 통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 존재의 변화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둘째, 성령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전에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었지만, 이제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능력이 생겼습니다(겔 36:27, 롬 8:4). 

헬무트 틸리케는 중독의 문제로 고생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이 청년은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다음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성령이여, 내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청년은 중독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청년의 기도의 핵심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안에 심어 놓으신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면, 성령이 내게 주신 새로운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해주는 능력을 의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면 성화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삶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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