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어제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거의 삼십 년 만입니다. 삼십 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연락하고 저를 만나준 그 사람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 사람이 술을 좋아해서 식사 후 작은 술집에 갔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에서 늘 미안함을 느낍니다. 저처럼 술 한 잔 받아 놓고 마시지 않는 건, 어떤 의미에선 상대방에 대해 예의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곳에서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젊은 남녀가 들어와 음식 포장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속 키스를 하였습니다. 제게는 남세스러운 일이라서 쳐다보지 않았지만, 소리까지 막을 수 없어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일을 돌이켜보며 욕망에 대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욕망을 못 이겨 다른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했겠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습니다. 욕망을 따라 그들이 질주할 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화합니다.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흔적 없이 허무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늘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의식하지 못한 채 늘 일어납니다.

어제는 고혈압 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혈액검사를 하고 한참 기다린 후에 의사와 대면한 시간은 삼십 초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십 초 정도 컴퓨터를 들여다 본 후), 좋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 없으시죠. (네.) 이제부터는 육 개월에 한 번 오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끝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 처방전을 출력해 병원을 나왔습니다. 전문가인 의사 앞에서 저는 그냥 환자에 불과했습니다. 삼십 초 동안 저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제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진 후에 겪은 경험들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일은 형제들의 왕따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왕따시킨 형제들은 자신들이 저를 왕따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묘의 이장 문제로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를 대했습니다. 그동안 연락을 안해서 섭섭했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자신이 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 지적을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코로나19 유행기에도 운영되는 서영남님의 민들레 식당(사진 철처 - 페이스북)

얼마 전 읽은 서영남님의 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노숙자들이 처음 노숙했을 때에는 그래도 남이 보니까 옷차림도 신경 쓰고 냄새나지 않게 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없는 사람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후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기에, 갑자기 아는 체 인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먼저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 옷매무새도 신경쓰게 된다고 합니다.”

“자기 이름을 불러주면"이라는 대목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됩니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존재를 지우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짓입니다.

그 원흉이 바로 욕망입니다.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자리는 가뭇해집니다. 피해를 받는 것은 타자들만이 아닙니다. 타자가 사라진 인간 역시 고립되고 고독해집니다. 아무리 욕망이 그것을 잊게 해주어도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영혼의 처소를 허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없는 사람 취급을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아이가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감옥에 혼자 있을 때 그 죽은 아버지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기가 죽인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그 아이와 같지 않을까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디아서 5:24).

아, 얼마나 장중한 선언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누가복음 10:25-37).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의 율법교사를 무책임한 종교 지도자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바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걸 간과합니다. 율법교사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너"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려면 우리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연대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 꽃이 되는 것입니다. 소외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사명입니다. 경쟁하는 사람, 차별을 두려는 사람, 누구를 조금이라도 혐오하고 배제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연결되어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교회입니다.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주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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