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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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근무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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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8.25  07: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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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M 회원과 KCJ 정기구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앙 체험 수기 공모전’에 앞서, KCJ는 로고스선교회 내에서 사내공모전을 주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두 달여 재택근무를 해야 했고, 마스크 착용과 거리 두기 등 근무와 일상을 제한하는 지침들로 심신이 조금씩 고달파진 이때,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각자의 신앙과 사역을 돌아보자는 취지였다.(편집자 주)

그날 처음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내가 일하는 부서의 동료들은 그전에 서로가 어떻게 집 한편에 본인의 책상을 꾸며놓고 근무할 것인지를 사진으로 보여 주기도 했는데, 신선하기도 했고 쿡쿡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평일 아침, 우리집 식구들은 식사를 마친 후 각각 자기 방으로 출근했다. 고3인 아들은 온라인 수업을 듣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남편과 나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일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출근 시간이 나보다 좀 이른 남편이 늘상 출근하던 그대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자기 방으로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편하지 않아? 집에서 일하는데?”

집에서 입는 헐렁한 면바지에 사자머리가 된 머리를 끈으로 묶어 올린 채 민낯인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입고 일해야 마음이 편해져.”

누가 보든 안 보든, 늘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진 남편, 그렇다고 옷을 입고 안 입고가 그 신념에 부합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확실한 태도를 부여하는 남편에게서 또 다른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아름다워야 할 봄날에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온 세계가 앓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창문 밖에는 나무 전체가 이 시절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계절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인지, 묵묵히 제 의무를 다하며 하얗고 작은 꽃망울들을 자꾸만 피워내고 있었다. 예전에 바라볼 때에는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했던 그 꽃잎들이 왜 이렇게 안쓰럽고 애처롭게 보이는지...

자고 나면 뉴스들이 나라별 감염자와 사망자 숫자를 어김없이 보도했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번지고, 미국과 세계로부터 한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을 때, 급기야 미국에서도 하얀 천 위에 붉은 잉크가 한 점 콕 찍히듯 감염자와 사망자 숫자가 지도 위에 찍혔다. 그리고 그 점은 옷감에 잉크가 번지듯 미국 지도를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엄정한 역사의 한 시절, 나는 그 중심에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그 모호한 날들을 조용히 숨 쉬며 바라보아야만 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흑사병으로 죽어 마차에 실려 가는 한 무더기 주검들의 흑백사진을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주 머언 먼 옛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흑백사진 이 지금 이 시간 똑같이 찍히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 무렵 선교회에서 ‘시편 91편’을 매일 읽으라는 권면이 전달됐다. 기독교 기반 위에 세워진 일터, 기독교 사역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일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역동적인 힘이 기쁨으로 전환되어 마음으로 들어왔다. 매일 일하기 전에 시편 91편을 읽으며 내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읽었다고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단어 하나하나가 새로운 깊이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선배의 말을 되새기게 되었다. 특히 시편 91편의 첫 구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분의 비밀스러운 곳에 사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는 굵은 의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중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는 이 말씀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각 사람은 마음과 생각이라는 밭에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생각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잡초가 심기고 결국에는 황폐한 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수고로이 땅을 일구어 열매 맺는 채소와 나무를 심으면 살아 있는 동안 그 열매를 먹을 것이고, 반면에 잡초만 무성한 땅에서는 황량한 날짐승만 오갈 뿐이겠구나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각자의 명분이 자초한 갈등 속에서 억울함과 증오심이 잡초처럼 자라고, 누군가에게 혹은 자기자신에게 그 억울함이 타당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잠 못 이루는 시간을 보내느라 인생을 낭비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결국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과 나 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가 결국 평생 살아가는 동안 내 삶의 열매가 될 것이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관계의 열매는 주님 앞에 갔을 때 나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삶에서 일생 동안 혹은 생의 어느 한 부분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족부터 시작해 친척, 직장 동료, 교회 신자, 친구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선택하고 행동한 결과로 형성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준 영향들로 인한 것들이 또한 내가 맺은 열매로 돌아올 것이다.

내 자신에게 물었다. 누가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내어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기꺼이 동행할 수 있는가를. 과연 내 살과 피 1그램이라도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님처럼 남에게 줄 수 있는가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주님의 반경에 과연 나는 얼마나 다가간 것인가를.

그런 생각들을 할 즈음, 나는 아직도 주님께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길을 찾고 있는데, 나보다 앞서 벌써 그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날마다 버리면서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가득 넘치는 듯 보이고, 주님처럼 살고,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이웃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게 행동해서 사람들에게 몰래 감동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마음의 고요함과 기쁨이 향기가 되고 잔잔한 감동이 되어 내게로 왔다. 어쩌면 바로 그들이 시편 91편에서 말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비밀스러운 곳에 사는 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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