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기뻐, 아 기뻐.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 종로 네거리에서 전하고 싶어."

로마서 8:18-30에는 성령이 하시는 일들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과 관계된 세 가지의 중요한 주제를 소개합니다. 영화, 부활, 그리고 세상의 회복입니다. 성령론 공부 아홉 번째 시간에는 영화와 부활에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묵상하고, 다음 호는 성령론 마지막 시간으로 세상의 회복에 참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영화(glorification)

로마서 8:30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는 믿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 가지 은혜가 등장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어둠(죄)에서 빛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은 말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이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된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께 돌아서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둘째, “의롭다 하심”입니다. 이것은 “칭의”(justification)를 의미하는데, 죄인인 우리를 “옳다” 선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난 호에 살펴본 것처럼 칭의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 “성화”(sanctification)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칭의의 순간, 우리 안에 내주하기 시작한 성령으로 인해 성화의 삶이 시작됩니다. 칭의와 성화는 함께 갑니다. 믿음과 삶은 함께 갑니다. 믿는 대로 살아가는 “성령 안의 삶”은 구원의 순간에 시작됩니다.

셋째,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이것은 “영화”(glorification)를 의미합니다. 영화가 무엇인지 고린도후서 3:18이 잘 설명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은 영화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하나는 “주님의 영광을 보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것이 영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영화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고후 4:4)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갑니다.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 우리에게 점점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눈부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이 눈에 부처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눈부처”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내 눈에 주님이 들어옵니다. 주님의 빛이 나에게 자꾸 묻어가는 과정이 영화이고, 이 과정을 통해 아담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것이 바로 영화입니다. 

고후 3:18에 나오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화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게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영광의 빛에 노출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영화를 이루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영화의 과정이 시작되지만, 영화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때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우리의 몸은 쇠약하고 병이 들어도, 우리의 속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며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의 순간에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 곧 “영원히 충만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 순간이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는 칭의의 순간 성령과 함께 시작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종말에 완성되는 “이미와 아직 아니 already but not yet” 사이의 긴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해 영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노출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더 옷 입은 사람입니다. 매일 주님 안에 있는 영광의 빛에 노출되도록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어제보다 주님의 모습이 더 나타나고 있습니까? 성령이 일으키는 영화의 과정에 우리를 열어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두 번째는 “부활”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몸의 속량”(the redemption of our bodies, NIV)이 의미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곧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령한 몸”(spiritual body, 고전 15:44)으로 부활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이 부활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로마서 8: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것도 성령의 역사이고,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에서 우리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부활이 가능하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이 “생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 다시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죽음을 제압하는 부활의 역사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부활에 관계함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이 고린도후서 5:4-5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부활을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이 제압되고, 죽을 육신이 생명에 영원히 사로잡힌 상태”가 바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보증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승현 교수는 “성령을 부활의 보증금”이라고 강조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돈을 꾸신 다음 보증금을 주시면서 나중에 잔금을 갚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을 보증금으로 주시면서 나중에 부활을 분명히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이승현, 『성령』 334쪽). 때로 부활이 과연 있을까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보증금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장차 있을 부활의 보증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나에게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은 전라도 광주에서 고아들을 위한 '동광원'을 설립했으며, 이 동광원이 한국 최초의 수도원으로 자라도록 인도한 한국의 영성가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임종의 순간 제자들에게 이런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아 기뻐, 아 기뻐.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까? 종로 네거리에서 전하고 싶어. 내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 죽음 앞에서 이현필 선생이 기뻤던 이유는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을 이루실 성령의 역사를 믿고, 부활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알려 주는 성령의 보증을 믿으면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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