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오토바이족이 떼지어 예배당에 들어선다. 머리에는 해적 두목처럼 두건을 두르고, 소매 없는 가죽 조끼에는 주렁주렁 쇠사슬 같은 장신구들이 달려 있고, 여름인데도 긴 가죽 부츠를 신은 그들의 모습에  시선이 집중된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본당 입구로 서둘러 나와 담배를 꺼내든 한 남자는 거리낌없이 예배당 근처의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운다.

노출이 심한 여름이면, 젊은이들은 온몸 가득한 문신이나, 한두 개쯤 애교스럽게 새긴 문신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언니, 아빠가 당신은 술을 마시기 때문에 교회에 못 가신대.” 전화기로 들려오는 동생의 속상한 목소리가 안타깝게 들린다. 얼마 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신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가자며 동생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버지께선 어디서 들으셨는지 술 마시는 사람은 교회에 못 오게 한다며 교회 나가기를 꺼리신다고 한다. 아마도 교회 행사에 두어 번 가셨을 때 아버지에게서 났던 술 냄새 때문에 뒷말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죄 있는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면서 초대하시는 예수님과 달리, 우리는 “죄 있는 자들은 다 저리로 가라”면서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물론 교회는 모두에게 문을 열어 놓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작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고, 문신을 하고, 동성애를 하는, 등등의 사람들은 쉽게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예전엔 길을 잃고 헤매는 꿈에 자주 시달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곤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부터 등골이 오싹했던 길 잃는 꿈을 꾸지 않은 것 같다. 길 잃고 헤맨 일이 꿈이어서 다행이었으나, 오랫동안 인생의 길에 대해 물어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까지 늘 길을 잃고 살았던 것 같다. 늦게나마 인생의 가을길에서, 잃어버린 길을 예수님 안에서 찾았고  지금은 그 길을 걷고 있다. 비록 온전하진 않지만... 

내가 그랬듯이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인생들이 그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아버지께서 미국에 오셨을 때, 난생 처음 교회란 곳을 가보신 아버지는 내가 들려 드렸던 예수님 이야기를 매우 흥미로워하셨다. 

최근에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아버지가 교회에 가시면 반가워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아직 아버지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제일 반가워하시는 분이 있다고.  

오랫동안 술을 드신 분이라 당장 끊을 수는 없겠지만,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시느라 일주일에 딱 하루만 약주삼아 드시기로 하고,  동생이 그 약속을 잘 이행하시도록 돕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이 땅에 왔다. 거칠어 보이는 오토바이족도, 예배당 한편에서 거리낌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나이도, 문신족도, 내 아버지도 이 땅에 살라는 명령을 받고 보내진 존재들이다.  

높은 문턱은 장애가 많을수록 넘기가 어렵다. 그 장애가 육체의 것이든 마음의 것이든, 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는 길이 필요하다.
삶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과 CCTV가 내 양심을 지켜 주는 양심의 외주화 시대에 그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답장이다.

우리는 그저 예수를 믿는 자인가? 아니면 예수를 따르는 자인가? 긍휼과 자비가 없는 “거룩” 은 “폭력”일 수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