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잘 보이기를 원한다.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쳐 가식이나 허식도 불사하고, 스스로의 처지나 위치보다 훨씬 더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허영심이라 부를 수 있겠다. 

나 자신도 이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짧지 않은 인생길을 되돌아보며, 요즈음의 맑고 청명한 날씨처럼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산 날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대부분의 날들은 겉치레와 과장, 진실되지 못함, 시기와 질투 같은 불순물들로 얼룩지지 않았을까?  이러한 마음에는 허영심이라는 불순물도 많이 섞여 있을 것이다. 겉포장인 허영심을 버릴수록 자유로워지는데, 그 노릇이 쉽지 않다.  성숙의 과정에는 허영의 꺼풀을 하나하나 벗겨버리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크리스천 작가로 명성이 높았던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는 “인간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허영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은 존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심지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택한 순교자도 혹시 그 순교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보다는 배교자의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려워서, 즉 그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배교를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작가는 인간 내부에 뿌리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허영심을 가차없이 끄집어 내고 있다. 

허영심 중에서도 우리가 흔히 주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허영심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자식은 부모의 장식품이 아니요,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방편이 아닌데도, 자식을 통헤 그 꿈을 이루려는 부모를 종종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배나무가 더 좋아 보인다고 사과나무의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식을 억지로 배나무로 만들려고 한다면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지인 중에 이러한 연유로 아들과 담을 쌓고 서로 연락을 끊고 사는 부모가 있다.

고등학교때 관람한 「초원의 빛」이란 영화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남녀의 사랑에 눈 뜨기 시작한 사춘기여서 여주인공 디니(나탈리우드 분)에 반해, 눈만 감으면 그 청초한 모습이 아른거려서 그 영화를 세 번이나 관람했다.  남주인공 버드(워렌 비티 분)는 여자친구 디니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농장을 이어받아 경영하길 원했는데, 아버지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들을 강제로 예일대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고, 결국 그 여자 친구는 깊은 마음의 상처로 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고,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슬픈 영화로 기억에 남아 있다. 

실제로 타주에 사는 지인의 가족 중에는 법대 지망을 원치 않는 아들을 부모가 강제로 밀어붙여 법대에 진학하게 하여, 졸업은 했으나 계속해서 변호사 자격 시험에 낙방하자 이를 비관한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투신한 사건이 있었다.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각 개인을 독특하게 창조하셨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의 역할이란, 뜰에 심은 과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물과 영양분을 골고루 주고 벌레가 먹지 못하도록 살충제를 뿌려 주듯이, 자녀의 특성을 살려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자라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닐까? 

솔제니친의 소설 『암병동』에는 “무슨 일이든지 끝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극히 유한한 인생길에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면, 부질없는 허영심을 버리기가 조금은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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