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모두 여섯 마리의 닭이 있다. 닭들의 활동 공간은 계사(Coop), 우리, 마당 이렇게 세 공간이다. 밤에는 계사에서 보내고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와 우리 안에서 보낸다. 그런데 한 녀석이 2미터 높이의 철망을 넘어 마당으로 나오더니 다른 닭들도 하나둘 울타리를 나오기 시작했다. 닭장 안에는 들여올 때부터 성계였던 두 마리의 흰 닭들만 있다. 

녀석들이 마당을 돌아다니면 할 일이 많아진다. 배설물도 치워야 하고 파헤친 화단도 정비해야 한다. 그래도 그냥 두는 것은 서열 1위인 한 녀석이 늦게 들어온 동생 녀석들을 심하게 괴롭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잘 지내다가도 별안간 쪼고, 자리뺏기도 다반사이다. 처음엔 녀석을 혼내기도 하고 격리시켜 보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녀석도 어떤 트라우마가 있나 보다. 독재자인 이 녀석을 다른 모든 닭들이 싫어한다. 그래서 거꾸로 왕따를 당한다. 힘은 있는데 외로운 녀석, 외로우니까 더 남을 공격하는 녀석. 나한테 몇번 혼나기도 했다. 정도가 심할 땐 이렇게 말한다.“너~어! 자꾸 그러면 물 끓인다!” 

그러나 아직은 경고성 발언에 그친다. 그 또한 생명체이기 때문이고, 그들 세계의 질서와 법칙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내가 통제 관리할 수 있다. 또 여섯 마리 모두가 ‘산란’이라는 양계의 목적 수행을 잘하고 있기도 하다.  늘 지켜보지만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그들의 해결 방식에 맡기고 있고, 기본적인 안전과 목적 수행의 여부에 따라 간섭하는 전략이라고 할까? 어떤 닭은 가끔 나를 무심한 하나님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둘, 닭들에게 먹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이다. 주로 위에서 아래로 뿌려 주기 때문이다. 땅에 뭔가를 던져 주면 잠시 난리가 난다. 좋아서 달려들고, 먼저 먹으려고 자리싸움을 하고, 안면몰수에 좌충우돌이다. 잡식성인 닭은 거의 모든 걸 먹는다. 그래도 안 먹을 건 안 먹는다. 입에 넣었다가도 다시 뱉는다. 어떻게 아는지 참 신기하다. 미세한 감각이 딱딱한 부리 속 어딘가에 있나보다. 인간도 저렇게 분별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셋, 고기도 좋아한다. 언젠가 프라이드 치킨을 사다 먹었다(닭을 기르며 닭고기를 사다 먹다니). 다 먹은 후 뼈와 뼈에 붙어 있는 살들을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에, “이거 닭 줄까?”라고 말했다. 그때 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라니! 진지하게 훈계를 들어야 했다. ‘자연스럽지 않고 비인간적’이라는 말이다. 사실 닭은 주면 잘 먹는다. 그 고기가 동족의 것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말을 따랐다. 동물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성과 양심 때문에 금기해야 하는 식습관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도 그런 규정들이 있지 않은가?

넷, 한 녀석이 없어졌다. 찾고 보니 어둑한 창고 한구석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 이른바 포란(알을 부화하기 위해 품고 있는 행위)을 하는 거였다. 20여 일 꼬박 제대로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자기가 낳은 알을 가만히 품고 있었다. 어깨 너머 들은 지식으로는, 어미로부터 직접 부화된 닭만이 포란 행위를 한다고 한다. 그 표정과 자세에서 경외심과 신비를 느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엔 수탉이 없어 모두 무정란이다. 그래서 아무리 품어도 부화되지 않는다. 유정란을 사다가 품게 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상임신한 여인처럼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새끼는 보지 못한 녀석이 안쓰러웠다. 종족 번식의 본능 때문이든 아니든, 생명에 대한 애착과 헌신은 모든 생물의 공통점인 듯하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생명을 경험케 한다. 그런데 그 생명을 함부로 빼앗고 또 포기하다니, 그야말로 순리에 반하는 행동이다.

다섯,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으면 놀랄 일인데, 한 녀석은 먼저 다가온다. 내가 안아 주려고 손을 내밀면 당연하다는 듯 가만히 안긴다. 눈을 마주보며 말을 붙이면, 알아듣는다는 듯 나를 응시한다. 

가끔 이 녀석이 내 바지나 발등을 쫀다. 공격은 아니고 반가움의 표시, 알아달라는 표시로 보인다. 문제는 애교로 봐주기에는 너무 아프고 불쾌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꾸짖기도 하고 부리를 손으로 툭툭 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여전히 못 알아 듣는 것 같다. 내게 뭔가 좋은 신호를 보내고 싶은데 의도와는 달리 아픔과 불편을 주는 것, 이것이 닭의 소통 방식의 한계이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정말이지 어려운 과제이다. 

* 편집자 주 :  곽성환 목사는 매일 아침 큐티 방송 <일일Ten>을 유튜브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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