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성탄절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외쳤던 천사들의 합창처럼 희망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소원한다. 

전 세계 인류를 공포에 떨도록 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금년 내내 기승을 부려 이미 수천만 명이 감염되고 사망자 역시 나날이 늘고 있어서, 하루도 안심하고 지낼 수 없어 우울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성탄절이 다가오는 시점에 공의가 되살아나고 치유의 서광이 비치는, 무엇이라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희망과 기쁨이 보인다.

지난 1년간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위축되었던 우리들의 마음, 각종 사업들이 영업을 제대로 못해 생계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일, 직장 폐쇄로 직업을 잃은 수많은 실업자들, 세계적인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부정부패가 창궐하여 정의와 진실이 사라져가는 현실, 여기에다 각종 선거 부정으로 세상 정치에 실망과 허탄한 감정까지 짓누르기에 참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삶을 지탱해 왔다.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이 그러했다. 바로 그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한 적이 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5-6).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예언이 아닐 수 없다. ‘크고 두려운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예언, ‘회개 촉구’ 그리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저주(curse)로 그 땅을 치리라’는 경고. 

이후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기고 400여 년을 유리 방황하며 옛 선지자들의 무서운 예언대로 살아야 했다.“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신 32:26),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렘 29:18),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7). 이러한 예언은 주전 400년 경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까지 이어졌으며, 서기 1948년 독립할 때까지 2천 년 가까이 전 세계에 흩어져 나라 없이 유리 방황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흑암의 세월 400년을 경험이라도 하는 듯 답답하고 어두운 세상을 사는 느낌이다. 동서사방을 둘러 보아도 희망은 보이지 아니하고, 제아무리 포악한 권력이 칼을 휘두른다 해도 인간을 이렇게 구속할 수 있을까 싶다. 그 어떤 독재 정권도 이렇게까지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지 못했고, 우리의 예배를 폐지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탄생시 상황도 참으로 참담했다. 그리스도를 고대하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막상 모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오자,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4-35)라고 모친의 마음을 쓰리고 아프게 했다.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던 간악한 헤롯은 아기를 찾아 경배하겠다고 위선을 떨며 막 태어난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꾀하기도 했고, 실패하자 한 도시에서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학살하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어둡고 답답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예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였다. 단절되었던 천국이 열리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눅 3:6) 된 것이다. 즉 예수가 오심으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마 11:5)된 것이다.

금년 성탄절을 맞으며 우리도 새로운 희망과 소망, 그리고 큰 기쁨을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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