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김학천 수필가, 치과의사

국경의 대평원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농사를 망친 소작인 일가는 은행과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고 고향인 오클라호마를 떠나 '기회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가족을 부양할 돈도 벌 수 있고 새 집도 지을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이었다. 허나 막상 캘리포니아에 도착해보니 기대와는 달리 일거리도 없고 지주들의 착취와 경찰의 폭력뿐이었다. 가족은 모두 흩어졌다. 절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익어갔고 더 자라 가지가 휠 정도였다. 1930년대 경제 공황을 배경으로 한 존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다.    

 1930년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경제파탄을 맞은 시기였다. 이 때 미국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죽기 바로 직전인 미국의 경제에 루스벨트가 취한 응급조치가 그 유명한 뉴딜정책이었다. 결국 그는 국민들과 함께 경제 공황을 극복했고 2차 세계 대전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인생전체에서 가장 큰 승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극복한 것이었다. 39살에 불현듯 찾아온 소아마비. 모두가 생각한 불가능을 이겨내고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4선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소아마비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긴 질병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전 세계를 휩쓴 소아마비 상황은 1952년에 가장 나빴다. 미국 전역에서 무려 58,000여 명 정도가 감염됐고 사망자가 3,000명도 넘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소아마비보다 더 두려워했던 것은 핵전쟁 밖에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공포는 엄청났다.    

  루스벨트는 재단을 설립하고 백신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 소아마비 국제 기금이 설립한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이 조너스 소크 박사였다. 약 7년 동안 수많은 연구원과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며 백신 개발에 주력했다. 영장류 실험에 성공한 소크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백신을 사람에게 투여해보는 단계에서 자신과 부인, 그리고 자신의 세 아이도 포함했다. 그리고 '소크 백신'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자 수많은 제약회사의 특허 양도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고 소아마비 백신을 무료로 풀었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그는 반문했다.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당신 같으면 햇볕으로 특허신청을 하겠습니까?' 

   이 후 소아마비 환자는 현저히 줄어들어 1984년부터는 한 명의 환자 발생도 보고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2000년 10월에 소아마비의 종식이 공식 선언되었다. 2012년 WHO는 10월 28일을 세계 소아마비의 날로 지정하였다. 

  지금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주요 국가와 기업들의 자원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 못지않게 기억되어야 할 것은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개발 단계 백신 임상시험에 자원한 사람들일 것이다. 헌데 우려되는 점은 특허료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 사람들만 백신을 맞고 형편이 어려운 나라의 국민들은 혜택을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 뒷이야기들이다. 70년 전 '소크의 지혜'가 새삼 떠오른다.  

편집자 주 : 김학천 수필가·칼럼니스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USC 치과대학, Lincoln 법대 등을 졸업, 2010년 한맥 문학지에 신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현재 북미주 한국 문학인들의 모임인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다양한 인생 경험과 인문학적 지식을 시대적 상황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칼럼에 담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