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학천 수필가, 치과의사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가축이 많아지면서 갈등이 빚어지자 롯은 소돔이라는 도시로 이주했다. 헌데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성적(性的)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곳이었다.

어느 날 신(神)은 아브라함에게 이 두 도시를 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신에게 묻는다. 만약 그곳에서 오십 명의 의인을 찾을 수 있다면 어찌하겠느냐고. 신은 파괴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오십 명에도 자신이 없어 다시 묻는다. 마흔 명이면 어떠냐고? 신은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다시 숫자는 점점 내려져 열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의인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결국 신은 두 도시를 파괴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 둘을 미리 보냈다.

밤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와 두 손님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두 손님과 섹스를 하려는 것이었는데 남색(sodomy)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러자 손님천사들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롯과 가족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도시를 떠나라고 했다. 신은 두 도시를 불과 유황으로 파괴했다.

얼마를 가다가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물이 아까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오늘 한국의 난국 사태를 보며 단 한사람만이라도 진실을 고하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많은 이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사 구분 없이 모두 한결같은 말들로 입을 맞출 수 있는 지 한편으로는 무척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예나 지금이나 의인 찾기는 어려운가 보다. 해서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의로운 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의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인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군주는 자신에게 동조하는 사람만을 곁에 두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위해 변신하는 무리들로 흐르는 강물이 고이게 되면 썩게 되듯 서로에게 해악만 끼칠 뿐이다.

연산군은 간언하는 모든 신하를 제거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 강력한 왕권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만 사용하다가 강제폐위 당하고 무너지지 않았나 말이다.

옛말에‘흥하고 망하는 것에 어진 사람은 절개를 바꾸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날 권력을 따라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오가는 정치인이나 바른 소리 한번 못하고 두 귀에 방울 달고 짤랑짤랑 대는 인텔리 집단들 그리고 시류에 편승해 쉽게 돌아서는 지식인들이 알아야 할 경구다.

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을 지었다. 그 안에‘의인(義人)의 길’이 있는데 그 양편에‘의(義)의 나무’를 심었다. 나치의 감시를 피해 유대인들을 도왔던 비유대인들의 의로움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참에 우리도 광화문 광장 한 복판에‘의인의 벽’과 그 맞은편엔 부패인 들의 이름을 새긴‘수치와 반성의 벽’을 세워 길이길이 후세에 전함이 어떨는지?

편집자 주 : 김학천 수필가·칼럼니스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USC 치과대학, Lincoln 법대 등을 졸업, 2010년 한맥 문학지에 신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현재 북미주 한국 문학인들의 모임인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다양한 인생 경험과 인문학적 지식을 시대적 상황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칼럼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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