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이맘때쯤 나는 올해 가기로 결정한 터키·그리스·로마 성지탐방의 여행사를 결정하고 참가자를 모집하는 일로 여기저기 연락 중이었다. 비용을 절감하면서 성지답사의 목적에 맞게 일정을 조정하는 일은 많은 조사와 협의가 필요했다. 한 지역 한 공동체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여러 주와 한국에서 참가자를 모집하는 일도 효과적인 홍보와 준비가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답사의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와 관광 경로가 아닌 성경 무대 중심의 심화학습여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도 신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2월이 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결국 출발이 예정되었던 4월 부활절 이후, 나는 터키의 성지가 아니라 터키의 성지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문화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기독교 역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는 콘텐츠들이 많아서 버츄얼트립은 생각보다 유익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젠 자유 여행의 시대가 끝났다”는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현장 학습이 목적이라면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그곳까지 갈 이유가 있겠나, 앞으로 성지순례 인솔은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교회 담임목회 아니면 목사가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역단체의 설립자가 되어 교인 없는 목회를 하고 있고, 온라인으로 월드와이드하게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로스터기를 돌리며 커피를 볶고 추출하기도 한다. 북미산 고급나무로 벤치나 테이블을 만드는 목수일을 하고 있다.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하다가 혼잣말을 할 때가 많다.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뿐이 아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예배를 가다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른 새벽에 참 열성이다. 저런 성의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혼잣말을 했다. 개에게 “엄마야~ 아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저 집은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지?’ 라거나 ‘가정 파괴 현상의 또 다른 면’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고 사랑할 자신이 없으니 개를 사랑하며 대리 또는 자기 만족을 누리는 것이라고 ‘예언자적 판단’도 했다. 보신탕을 즐기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고, 88 서울 올림픽때 개고기 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땐 한국의 식용 문화의 한 면이라는 주장이 일리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내가 두어 달 전부터 여기저기 물어보고 검색해 1주일 전 유기견 센터에서 한 살 좀 더 된 개 한 마리를 입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데리고 나가 용변을 보게 하고, 낮에는 개 공원에 가서 다른 견주들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인 양 인사를 나눈다. 더 놀라운 것은 개를 무릎에 앉히는 것은 물론, 녀석이 침대에 올라와 자려 할 때에도 밀어내지 않고 옆에 끼고 잔다는 사실이다. 개똥을 검은 플라스틱 주머니에 주워 담으면서 또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참 나! 내가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올해처럼 실감나는 때가 있을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려니와(본시 인생은 모두 처음 살아가는 날들의 연속이니까),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과 상황의 연속이다. 혼자만 겪는 게 아니라, 너도 나도 다 겪는 일이다보니 외롭거나 억울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감사할 뿐이다. 또 한 가지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고 순응을 선택하게 된 것도 감사하다. 저항과 회피보다 상황 속에서 의미를 찾고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니, 이런 모습을 통치자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까? 맹세하는 일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아니, 그런 것은 아예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과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무너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이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각자 나름대로 살아왔던 기준들, 고정관념들 그리고 허용의 범주들이 무너지고 낮춰지는 2020년. 우리가 “절대 안 돼!”라고 선을 그은 그 너머에도 하나님은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복이다. 그곳에도 계신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니 말이다. 그 하나님이 인간 되신 날, 그래서 조금 더 쉽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성탄절이 있어서 또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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