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 수영을 하다가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잠시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수영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헬스장 할인 기간에 싼값으로 일 년 이용권을 끊었습니다. 하지만 마스크를 끼고 운동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서 결국은 돈만 날린 셈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헬스복을 입은 건장한 근육맨들과 몸매가 좋은 여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들이 얇은 헬스복을 입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기 몸에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에 몰입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성형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성형을 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만족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고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에 인간은 좀처럼 행복해지기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몰입하면 할수록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사코 더 가지려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경쟁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경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쟁 없는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경쟁 없는 세상에는 흥미조차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들으면서도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아니 본인은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은 심각한 장애를 가진 부끄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자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들도 자랑스러운 부분을 자랑하기 위해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어 벌거벗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느라 일부러 벗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같습니다. 특히 간증하는 사람들이 이들과 같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엘렌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12년 전에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인 KBS 일요 스페셜이라는 프로에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볼티모어에 살고 있는 시각장애인 부부, 니콜스씨 부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해 모두 4명의 아이를 입양하였습니다. 모두가 시각장애를 가진 한국아이들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킴과 둘째 아들인 마이클은 여러 번의 수술을 통해 약간의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문직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킴은 방송 내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한국 사람들이 나타나 자기를 데려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버지 니콜스씨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셋째인 엘렌은 결혼하여 뉴욕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기르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막내인 세라는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프로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니콜스씨 부부가 바로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니콜스씨는 그 방송에서 "사랑은 성과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는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을 반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사람이 된) 말씀을 보았습니다. 제 속에서 부끄러움이 솟구쳤습니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것들이 엉켜 한참을 울어야 했습니다. 

엘렌은 이 방송에 출연한 셋째 아이였습니다. 12년이 지난 후 한 매체에서 그녀를 다시 찾아 인터뷰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 겪는 어려움마저 더해져서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나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하구요. 다른 해결책도 시도해 보고 끊임없이 연구합니다. 신뢰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인내한답니다.

엘렌의 대답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 줍니다. 저의 기도를 돌아봅니다. 사실 관상기도를 배우면서 절실한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내용과 수준은 그 사람의 신앙과 정비례합니다. 엘렌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녀가 가진 시작장애가 그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을까요. 그녀의 담담한 말 앞에 벌거벗은 제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생각을 멈춥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결정으로 이미 생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었던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생각이 많은 것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할까요. 엘렌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기도하는 삶은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묵상의 결과에 따라 해결책을 시도해 보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삶은 바로 그녀의 부모인 니콜스씨 부부가 보여 주었던 육화된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그녀는 신뢰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얼마나 신중한 삶을 사는가를 그녀가 보여 줍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녀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는 없습니다. 신뢰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신뢰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모습은 오늘날 개인주의에 함몰된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목사나 신부와 같은 성직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얼마나 빈약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엘렌에게서 풍성한 생명의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인내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환난이었습니다. 시작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내의 삶을 사는 것이었고, 시각장애인이라는 환난이 그녀에게 이루기 힘든 인내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그 인내는 참된 신앙의 삶의 출발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렌은 인내만을 말했지만 저는 그녀의 말에서 희망을 봅니다. 단련된 그녀의 인격(자신에게 몰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되는)은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생명(니콜스씨 부부의 믿음)이 생명(믿음)을 낳은 것입니다.

코로나로 어려워진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분들이 엘렌을 보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렌처럼 신앙의 삶으로 들어가 인내를 이루고 소망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환난을 자랑하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엘렌처럼, 그녀의 부모님처럼 살아 있는 말씀을 보여 주는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엘렌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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