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한국에서 가슴 조이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아니지만"

 

노아의 홍수 이래 가장 오랫동안 온 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하여 대지는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흠뻑 젖어서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지쳐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이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렇게 주야장창 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커다랗게 지어 놓은 그린하우스 안에서 땅을 파고 미리 농사 지을 준비를 해보려고 몇 삽을 뜨고는 포기해 버렸다.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온실 안에서도 주위에서 스며든 빗물에 의해 어디를 가도 흠뻑 젖어 있어서 한 삽만 파내어도 물이 콸콸 스며 나온다. 3개월 이상 계속되는 장마 기간에 햇볕이 반짝 든 날은 5일도 안 되는 것 같다.

금년에 큰 추위는 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예년 같으면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연말연시가 가장 추웠는데 금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무서워서 추위도 얼씬 못하는가보다.

오늘은 새해 첫날, 어릴 적 한국에서 가슴 조이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아니지만 음력은 사용하지도 않는 이 미국 땅에서 1월 1일을 설날이라 하여 식구들끼리 떡국이나 끓여 먹고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세배를 가르치고 세뱃돈을 주면서 향수를 달래곤 했다. 한국의 전통명절을 알려 주기 위하여 세뱃돈은 늘 넉넉히 주었기 때문에 이제 머리가 다 크고 각자 살림을 차리고 사는 지금까지도 설날을 기다리며 다 모여 하루를 즐기게 되었다.

며칠 전에는 막내아들이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는다. 엄마 아빠와 고모가 늙어서 이런 때는 조심해야 하니까 다 생략하자고 하니 아쉬운 듯 알았다고 대답한다.

해마다 우리 가족은 추수감사절에는 큰 아들 집에서 칠면조를 구워 먹고,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집에서 모이고, 정월 초하루날에는 고모 집에서 모여 떡국을 먹고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모든 것을 생략해 버렸다.

내가 살던 농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여름에 수확한 보리와 가을에 수확한 벼를 동네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수확량의 1/10을 삯으로 주었다. 그 시절에는 인심이 좋았기 때문에 방앗간에서 무료로 떡을 만들어 주었다. 각 가정마다 커다란 시루에 쌀을 쪄가지고 갔으며, 혹여 식으면 잘못 될까봐 담요로 시루를 둘둘 말아놓고 순번을 기다렸다.

섣달 그믐날은 설음식 준비로 바쁘기 때문에 하루 전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방앗간은 바쁘게 돌아갔다. 40-50 cm 정도 되는 가래떡 2개씩을 수고비로 받고 그동안의 고객들이 방앗간을 이용해 주었다고 보은의 서비스를 하는 충남 예산의 훈훈한 인심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위생이 어쩌니 하며 떡 방앗간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아름다운 풍습이 사라졌다.

각 가정마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끼리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나면 개구쟁이 우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다녔다. 대부분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세뱃돈을 주는 가정은 거의 없었고, 설음식 중에서 다식, 과줄, 곶감, 떡, 엿, 밤, 대추 등등을 주시면 자루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아가지고 어느 집에 모여 윷놀이를 하면서 먹고 놀았다. 지금은 세상이 변하여 이런 풍습도 거의 사라지고 아련한 추억만 남아 있다.

31일 타코마에 있는 도매상으로 팔 물건을 사러 가는 김에 동양식품점에 가서 당분간 먹을 음식을 사왔다. 내일이 설날이란 사실조차 잊고 코로나로 어수선한 와중에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빨리빨리 쇼핑을 하고 와서 보니 설날 먹을 떡국을 잊어버리고 사오지 않았다. 냉동고 속을 뒤지니 떡볶기용 가는 흰떡과 내가 가끔 즐겨먹는 가래떡이 한 봉지 나온다. 그것을 녹여서 썰고 물에 담가 놓았다. 국물은 보통 소뼈를 고아서 준비하지만 준비된 것이 없다.

지난 봄 단골손님이 잡아서 맛보라고 가져다 준 곰 고기와 뼈를 고아서 만들기로 했다. 얼은 것을 녹이고 한참동안 끓이니 구수하고 맛있는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세상에 우리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색다른 음식이 탄생한 순간이다.

곰 고기는 질기거나 팍팍하지 않고 사근사근한 맛이 일품이다. 많은 양념을 하지 않아도 통마늘과 생강과 된장 한 수저를 넣고 끓이면 모든 잡냄새도 사라지고 독특한 맛은 소고기를 능가한다. 어느 경험자의 말에 의하면,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장점만 모아 놓은 맛이라고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업장을 닫아야 하고, 직장을 잃고 어려운 중에도 일할 수 있는 가게가 있고, 좋은 인심 속에 단골손님들과 사랑을 나누고, 예쁜 공작새들과 몇 마리의 닭과 오리까지 기른다. 널찍한 그린하우스를 짓고 각종 채소들과 과일나무, 화초들을 가꾸며 살 수 있으니,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은혜가 무한 감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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