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 분별의 예: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해서②

유대에서 내려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율법적 정체성을 보존했다. 특히 할례의 문제는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메시아 예수도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다는 사실로(눅 2:21) 말미암아, 할례는 양보의 여지가 없는 순종 그리스도인의 스탬프였다. 그러니 이방인들도 할례를 다시 받아야 자신들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이자 형제로 인정되는 것이었다.

먹는 문제도 컸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헬라인이나 다른 이방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다(행 10:28). 지금이야 한 식탁에서 고기를 먹든 야채만 먹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였다. 이는 마치 사람이 한 식탁에서 동물과 같이 밥을 먹는 셈이다. 이방인과 식탁을 나누는 문제는 나중에 바나바와 베드로에게도 영향을 미쳐 바울의 공식적인 비판을 받는다(갈 2:11).

드디어 분쟁이 일어났다. 아니다. 단지 분쟁 정도가 아니라 위기였다.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그곳 공의회의 의견을 묻기로 결정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소위 정통 제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이 협력관계인지 경쟁관계인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마음은 복잡하다. 이전 두 번의 예루살렘 방문 때를 기억하고는 더더욱 감회가 새로워진다. 한 번은 회심하고 3년만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고(갈 1:18), 두 번째는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대표해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방문은 그의 회심 후 14년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자신의 율법적 태도에 대한 공의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 역시 유대인으로 할례자였고, 안디옥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율법에 대한 그의 생각은 관대했다”라고 바울 전문가 제롬 머피 오코너 신부는 그의 책 『바울이야기』(두란노, 2006)에서 밝힌다.

하지만 안디옥에 와서 바울은 이런 율법적 불관용이 교회에 어떤 치명적인 위해 요소가 되는지 직접 목격했고, 이번에는 교회에서 더 이상 이런 유대적인 율법이 자리잡을 수 없도록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각오를 다진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율법마저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롬 머피 오코너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을 무려 90회 이상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사망의 도구’가 된 것에 대해 비난한 것이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

바울은 이번에 바나바와 함께하는 여정에 이방인 디도를 동반하는(갈 2:1) 지혜를 구사한다. 디도는 헬라인이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였다. 바울이 할례를 받지 않았으되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범으로 동역자인 디도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디도는 이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수살렘에서 주님의 열두 사도들을 만날 것이며, 그들이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복음을 추인하는 서신을 작성할 때 증인으로 참석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대해서, 21세기 이야기꾼 진 에드워드의 손을 빌려 일기를 쓰게 될 것이다. 제목은 『디도의 일기』 (생명의말씀사, 2015).

공동체 분별의 원칙 1
분별의 요청자는 모든 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공의회가 드디어 소집됐다. 안디옥 교회에서 온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게 된다”(행 15:4). 여기서 공동체의 분별을 위한 원칙 제1조가 만들어진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한다는 .’ 

법정에서 증인이 세워질 때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형사소송법 제157조 2항)”라는 선서가 우선되어야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뤄지는 이런 분별의 과정 역시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지독히 정직한 고백과 증언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런 종교적 공동체의 분별은 도리어 더욱 더 강제적이고 비인격적이고 세상적인 법정에 그 분별/판결의 자리를 내줘야 함이 옳을 것이다. 세상의 법은 외적인 증거를 가지고 말하지만, 하나님 법정 앞에 선 우리들은 양심으로 말한다. 이 양심이란 가공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문제를 공동체와 남과 상의한다는 전제는 나의 모든 것을 나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기만의 행위이다. 의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간 환자가 자신의 증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털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구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자식의 골치 아픈 문제를 교회로 가져가서 공동체의 분별을 구할 때, 우리는 모든 집착과 기대와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자식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뭐가 문제인가? 그리고 지금 어디까지 가 있는지? 내 말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물론 나의 과거의 한국 교회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고, 내 주위의 교인들 역시 이런 경험에 용기 낸 기억이 없다. 늘 교회는 교회였고, 목사는 목사였고, 가족은 가족이었고, 나는 나였다‘. 내 문제를 누구한테 털어 놓아? 창피하게!’

지금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는 자신들이 듣고 보고 처해 왔던 안디옥 교회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다 털어놓았다. 일부 바리새파 출신들이 공식적으로 반감을 표시했고 드디어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많은 공개적인 변론들이 이어졌다. 그동안 바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온 소위 메시아 추종자들이 먼저 소리를 높였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15:5)

공동체 분별의 원칙 2
'참가자 모두 말할  있는 ‘안전한’ 분위기가 허락되어야 한다.’

이 공의회를 통해 배우는 공동체의 분별의 제2조는 ‘변론(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의회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친 바울파만 모인 것이 아니다. 바리새파 출신도 있었을 것이고, 한때 베드로가 참가했던 열성파들도 있었을 것이고, 물론 열두 사도가 그 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이들에 의해 세워진 장로들도 있었다. 

출신과 직책과 관점이 다양한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어로 ‘ζήτησις(제테씨스)’라고 하는 소위 현대판 ‘디베이트(debate)’를 한 것이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정보를 찾고 질문을 하고 조사를 하고 변론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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