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여름쯤, 논산육군훈련소에서 조교로 군인생활을 할 때였다. 계급은 병장이었다. 편지가 내게로 하루에 100통 넘게 배달되었다. 총 1천 통이 넘었다.

군인우체국에서 크게 놀랐고 연대장에게도 보고되었다. 그 며칠 전 휴가 나왔을 때 동아일보 <남성 살롱>이라는 칼럼난에 ‘남의 아내에게 쓴 편지’라는 나의 글이 실렸다. 내 군부대 주소와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의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토요일이면 훈련소 병사들에게 편지 쓰기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병사는 편지를 쓰지 않고 멀뚱멀뚱했다. 상담을 했더니 글을 배운 일이 없어 편지 쓸 줄 모른단다. 고향에는 홀어머니와 아내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쓰고 싶은 내용을 묻고 내가 대필해서 보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실력을 발휘했지만 그들 눈높이에서 썼다. 얼마 후 그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다. “군대에 가시더니 글쓰기도 배우셨군요.” 그런 구절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예수 믿는 청년이라 죄책감이 들었다. 아직 총각이었지만 남의 아내에게 ‘여보, 그 동안 혼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고 쓸 때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것 같은 죄책이었다. 그런 내용을 그 칼럼에 담았다. 아무튼 그 편지들을 온 부대에서 나누어 읽었다. 위문편지 치고는 만점짜리였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써 보낸 편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부터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 대학의 교수가 본직이었지만 언론에 글 쓰는 일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특히 유명신문 조선일보 ‘일사일언’ 필자도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비판적 칼럼을 썼다가 중앙정보부의 무서운 경고도 들었다. 그때 조선일보가 싣지 못하고 되돌려온 원고를 지금도 기념품 삼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

1980년대에 평양복음화대회 준비 차 지금은 돌아가신 김의환 목사님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그때 우리 안내를 담당했던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교 조선어문학과 출신이라 했다. 그도 내가 쓴 조각글을 읽었다고 했다. 그때 북조선을 위해서도 조각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순간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미주에서 김일성을 냉혹하게 비판한 조각글도 썼기 때문이다. 아무튼 북한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 가족까지 죽이겠다는 익명의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크리스천 저널>에 조각글을 게재한 것은 40년 가까이 된다. 이제 나이도 팔십 줄에 들고 보니 정리할 때가 되었다. 그 동안 귀중한 지면을 제공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조각글에 찬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반론도 있었고 집단적 저항도 있었다. 그런 일들도 합력하여 유익한 선을 이루게 된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로마서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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