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집 새해 아침은 쉴새없이 바쁘다. 집안의 종손이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어린 시절,  새해 아침이면 할아버지께 세배하러 오시는 친척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럴 때면 현관 가득 벗어놓은 신발들을 신기 편하도록 정리하는 게 내 임무였다. 좁은 현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신발들을 짝 맞춰 정리해 놓으면, 어른들이 수고했다며 용돈을 챙겨주시는 재미가 쏠쏠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관에 어지럽게 널려진 신발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올해는 코로나로 가족 모임이 제한되어  화상통화와 화상세배를 한다지 아마...

소방관으로 일하는 둘째가 코로나19로 한층 바빠져 얼굴 보기가 힘들다. 거의 매일 코로나 환자들을 병원 응급실에 이송하다보니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집에 자주 오질 못한다. 어쩌다 집에 온 둘째의 신발을 정리하다가 밑창이 닳아서 곧 구멍이 날 것 같은 신발을 보며, 이 신발을 신고 부지런히 살았을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우리네 인생도 이 신발 밑창 같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전화벨이 생각에 잠긴 나를 불러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대답이 없어 번호를 확인하니 K였다. “뭐야? 전화 걸어놓고 왜 말이 없어? 잘 지내지?”짤막한 침묵이 흐른 후, K는 “나, 아프대.  암이래.”라고 말했다.

며칠 전부터 자꾸 생각나 연락해 보려던 참에 걸려온 전화여서 더 당황스러웠다. 애들 키워 놓고 좀 쉴 만한 나이가 되면 병이 친구하자고 찾아온다더니 K의 상황이 그 현실을 말해 준다.  언제나 쾌활하고 긍정의 힘을 갖고 사는 친구여서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오래 전에 죽음의 문을 두드리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여지껏 살아온 나이지만 K의 상황이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수술할 때까지 몸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와 코로나19 때문에라도 바깥 출입을 삼가야 하기에 잠깐 얼굴만 보기로 했다. 몰라보게 야위었고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트레이드 마크 같던 유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몇년 전 시집간 딸이 가끔 속상하게 한다는 말을 한 마디씩 했지만 딸로 인해 병이 날 만큼 힘든 상황인 줄 몰랐다. 한참 예민하던 중학교 시절 왕따 경험이 있어 정신과 치료를 받긴 했어도, 잘 커서 시집간 딸에게 뭐 그리 속상할 일이 있었을까 얼른 이해가 안 되었다.

K는 딸아이가 왕따의 상처가 제대로 치유가 안 되었는지 상황에 따라 자신을 놓아 버린다고 했다. 시집가서 잘 살아 주려니 했건만 적응을 못하고 가끔 마약까지 손을 댄다며 통곡했다. 그동안 자식일이라 남에게 말도 못하고 속앓이 했을 K의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K는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탓이라며 자책했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정신과 상담 몇 번 받게 한 걸로 안심했던 자신의 미련함이 한스럽다고 했다. 그땐 사업이 바쁘고 교회일에 충성하느라 아이 돌보는 일을 소홀히 했음을 이제야 뼈아프게 느낀다고 했다. 사업도 성공하고,  권사로서 교회에서 인정도 받고, 외관상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정작 인생의 알짜배기인 딸과 K 자신은 텅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라고 했다. 무너지는 K를 보면서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K야! 나 제안 하나 해도 돼?  우리 신발 정리 한번 해보자. 우리가 신고 뛰어 다녔던 신발들을 창조주 앞에서 다 벗어 보자. 지금부터 하나하나 신발을 벗으며 정리하다보면 답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신발 신고 뛰어 다니며 쌓았던 이력을 다 내려놓고 맨발로 그분 앞에 서 보는 거야. 

그분의 부르심 앞에 서는 날을 난 늘 상상해. 복역의 때를 끝내고 돌아갈 때 물로 씻기시고, 굳은 마음 제거하고 새 마음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우릴 새롭게 꾸며 주시는 그분의 자비를 기억하자.

그분이 부르실 때 우리 이거 하나는 가져 가자. 세상에서 신발 신고 다니며 열심히 쌓은 이력들 말고 지금보다 좀더 나아진 ‘변화된 내 존재.’”

두 손 맞잡고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우리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우리의 두 신발 위를 적신다. 이 눈물이 흘러 K와 그 딸이 회복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창조주께 호소한다. 

“모세야!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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