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로고스 채플 강단(8)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누구라고 말하는지 질문하신 후,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고무적인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신다는 말씀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 라고 만류하자,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면서 베드로를 책망하신다. 

그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 형제와 요한의 형제들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물을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되심을 고백했으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에 사로잡힌 반응을 보이자 예수님은 이들에게 참된 제자의 길을 알려 주신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생각과 주장, 야망 등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빌립보서 2:6-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다 부인하시고, 곧 자기 자신을 부인하사 자기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사도 바울 또한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고백했는데,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으며, 율법의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전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이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율법에 완벽한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다. 

 

유기성 목사님은 설교 중에 한 예화를 소개한다. 선교사 한 분이 목사님에게 와서 “목사님, 제겐 아내가 십자가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팔뚝을 보여 주었는데, 물린 자국이 있었다. 아내가 팔뚝을 물어뜯었다는 것이다. 팔뚝을 물어뜯는 아내를 감당하기 어려워 아내를 십자가라고 하지만, 사실은 팔뚝을 물어뜯는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에 대한 적절한 예화이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어느 순간 내 생각과 주장에 어긋날 때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힘들어 걸려 넘어지고 스티그마처럼 작용하는 말씀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 자신을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본 자라고 하신 말씀에 넘어졌다. 부자 청년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지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한 말씀에는 순종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인정하면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인정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 역시 예수님은 메시아이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생각에 예수님을 만류한 것을 보면 자기 부인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을 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는 하나도 없었으며, 베드로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대제사장 여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뿐더러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는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자신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얻게 되는 영광이요 면류관이다.

W. G. 콜트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라고 말한다. 자기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고 힘들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 로마서 8:18에서 사도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자기 십자가에 영광의 선물이 있으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지만, 지속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가 사무엘 러더포드는 이런 고백을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가 져 본 짐 중에서 가장 달콤한 짐이다. 그것은 마치 새에 달린 날개와 같고 배에 달려 있는 돛과 같아서 내 목적지에 이르게 한다.” 새의 날개가 새로 하여금 날게 하고, 돛이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해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 중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본회퍼는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것은 나와 함께 죽자고 초청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단은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싫어해서 십자가의 이미지를 왜곡시켰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에 가서 매달려 죽는 형틀의 이미지였다. 오늘날도 큰 차이가 없어서 십자가하면 드라큘라가 생각난다는 사람도 있고, 고난과 고통 등 감당하기 어려운 이미지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이 되신 후, 십자가는 더 이상 고난과 고통의 형틀이 아닌 영광의 상징이 되었다. 자기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영광이요, 면류관인 것이다. 자신의 등 뒤에 무엇을 짊어지고 사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기 십자가의 고귀함과 영광스러움을 느껴 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 “갈보리산 위에” 찬송의 내용처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을 받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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