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공동체적 분별의 예: 예루살렘 공의회 ③

아, 성경 그리고 분별 (27)

구약과 신약에서의 분별 문화
사도행전 15장의 공의회와 같은 공동체적 분별의 문화는 구약 시대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인간들 잘못에 의해 부과된 것이니 인간들이 할 일이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용서와 자비와 축복을 비는 것뿐’이라는, 욥의 친구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구약 시대에,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인간의 분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에 대한 불신이자 거역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공동체적(혹은 개인의) 분별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영적 라이벌로 여겨졌다.

하지만 공동체적 분별이 성령의 기초 위에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공한 사례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자 모세가 하나님에게 하소연한다. “왜 이런 백성들을 저에게 붙이셨습니까? (...)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를 죽여 이 꼴 더 이상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민 11:11~15). 여호와는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주님께 데려오면 그들에게도 모세에게 내린 영을 내리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이 너(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 11:17)라고 말씀하신다. 백성에게는 내일까지 기다리면 냄새도 맡기 싫어질 때까지 고기를 먹게 해준다고 말씀하신다.

말씀대로, 여호와의 영이 칠십 장로에게 임하고 그들은 예언을 한다. 진영에 남아 있는 두 명에게도 영이 동일하게 임하고 예언을 한다.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 이 두 사람이 예언하는 것을 말려 달라고 간청한다. 모세는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모든 자가 선지자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공동체 가운데, 각 개인과 함께 하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계몽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30:11-14 말씀에서 보듯이, 주님의 말씀은 결코 하늘이나 바다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과 마음에 있어서 우리가 그 말씀대로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임하신다는데, 무엇이 두려워 공동체적 분별을 기피하는가?

 

신약 시대에 들어서 첫 번째 공동체적 분별은 사도행전 15장에 소개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아니라,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정결의식’에 대한 분별이다. 여기서도 변론이 일어난다(요 3:25). 문제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푸시는데 이것이 그들의 정결의식에 합당한지를 가리는 것이다(율법적으로 정결은 음식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신앙의 모든 부분에 적용된다). 그 뒷면에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 가서 세례 받는 것에 대한 질투도 있었을 것이다. “저 자가 도대체 누군데 우리 스승의 사역을 낚아채고 있단 말인가?” 

성령에 속한 자 세례 요한은 결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기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자기는 쇠하는 자이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흥해야 한다고, 그를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다고 선포한다(요 3:27-36). 

이 말을 들은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더 이상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이 듣는 자들의 골수에 박혔다.

공동체적 분별에서 변론이 이뤄지려면 참가자 각 개인의 자유함이 전제돼야 한다. 이 자유함은 참가자들이 분별의 자리에 올 때 자신의 생각/고집(‘나는 이것을 꼭 관철시키고야 말 거야!’)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가지고 공동의 분별 과정에 참가한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는 것이다. 우리는 잘 안다, 꼭 이런 자가 분위기를 망치고 주도하고 마음대로 안되면 뒤집어엎는다는 것을!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공동의 분별 과정에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인도하실지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오는 게 분별에서 요구하는 영적인 자유이다.

퀘이커의 명료화 위원회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변론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결과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개인/집단의 기대와 압력도 성령님과 경쟁하도록 허락해선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정치를 하러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기에 이런 각오가 필요하다.  분별하는 자들 가운데 누구에게 더 신앙적 권위가 있는지 경합하는 자리가 돼서도 안 된다. 누가 더 많이 떠들게 해서도 안 된다.

16세기의 아나뱁티즘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다시 해석한 『이것이 아나뱁티스트이다』(대장간, 2011)의 저자이자 영국의 침례교 목사인 스튜어트 머레이(Stuart Murray)는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한 사람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교회를 ‘영적인 회중’으로 보지 않았다.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요구되고 기대되었다.”라고 말했다.

공동의 분별 과정에서는 많은 인원이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한국의 유교적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참가자들의 고른 발표를 위해 제도적인 고려가 필요할 수 있다. 열두 사도든, 목사든, 평신도든, 모두가 동일한 한 표의 자격으로 정직하고 겸손하게 ‘지금 여기서 성령이 어떻게 말하시는가’에 대해 진솔하고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같은 종류의 인간들만 모아 놓으면 안 된다는 게 퀘이커의 ‘명료화 위원회’가 알려준 지혜이다. 공동의 분별자 그룹 안에는 다양성이 ‘최대한’ 존재해야 한다. 나이와 배경과 성과 전문성을 뛰어넘는 지혜로운 구성이 필요하다. 『들음의 영성』(포이에마, 2009)의 저자이자 미국의 영성지도자인 존 애커만 역시 공동체의 분별에서 공평하고 폭넓은 경청을 강조한다. “신자들의 능력을 강화하는 교회는 초신자와 일반 신자, 여성, 어린이에게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서 배운다.” 

분별 과정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나누는데 어떤 구비 조건이 있나? 성령이 나이와 조건을 따지던가?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이 일이 나의 일이요, 나중에 주님 앞에서 판단될 일’이라는 엄중함 속에서 공평하고 자유로운 변론을 해야 올바른 분별이 이뤄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별의 기술』에서 고든 스미스가 소개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권고는 이때 마무리로 적절하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 것.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자들이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 것.”(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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