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 왕이 죽자 10년 전 월나라에게 침략 당했던 원한을 갚기 위해 월나라를 침공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월나라 왕 구천의 반격에 실패하고 화살을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합려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 왕 구천이 나를 죽였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왕이 된 부차는 가시 돋은 섶 위에서 자며 부친의 원수를 다짐했다. 이른바 '와신'이다.  

  그리고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를 안 월왕 구천은 책사 범려의 만류에도 듣지 않고 선제공격을 하다가 전쟁에 패해 항복하고 볼모로 끌려가 마부 노릇을 하며 3년 간 치욕의 나날을 보냈다. 결국 '영원히 오나라의 속국이 되겠다'는 충성맹세를 하고나서야 월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오나라에서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잠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그 쓴맛을 핥았다. 이를 '상담'이라 하고 앞서 나온 와신과 합쳐 와신상담이 나온 배경이다.   

  암튼 월왕 구천은 범려와 대부 문종과 함께 안으로는 힘을 기르는 한편 미인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보낸다. 결국 부차는 그녀의 미색에 빠져 나랏일을 게을리하고 오만한 정치를 하다가 국력이 쇠약해져 구천에게 멸망하고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로써 월나라가 패권국이 되자 범려는 갑자기 모든 관직을 버리고 잠적한다. 떠나기 전 대부 문종에게 "월왕은 어려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부귀를 함께 누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니 대부께서도 물러나십시오"라고 충고했다. 이 토사구팽의 충언에도 주저하던 문종은 결국 범려의 예상대로 모반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결하게 된다.    

 범려는 그후 이름을 바꾸고 장사를 해 막대한 부를 얻었다. 범려의 이름을 들은 제나라가 범려에게 재상직을 권유하지만 사람들에게 모든 재산을 분배하고는 또 사라진다. 고위직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정치든, 사업이든 권력의 자리에서 제 발로 내려오기를 꺼린다. 자신이 이룩한 세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오늘의 IT 분야에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CEO 자리를 떠나거나 후배에게 물려 주는 유명 창업자가 적지 않다. 구글을 세운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46세 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MS의 빌 게이츠 또한45세에 CEO에서 물러났고 65세 때엔 이사회 의장직마저 내놨다. 

  이제 또 한 사람이 그 대열에 섰다. 지난 2일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깜짝 퇴진을 선언했다.  27년 간 유지해온 아마존 CEO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직만 수행할 예정이라고 밝힌 거다. 기업가치가 1조7000억 달러에 이른다. 베이조스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친다.'며, 펀드나 우주사업, 디지털 언론 등 새로운 분야에서 계속 도전할 것임을 암시했다. 

 '성공자퇴(成功者退)'란 말이 있다. 공을 세운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기회가 왔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인생의 정점에서 한 계단 내려올 줄 아는 절제 또한 중요하다는 얘기다. 해서 이형기 시인은 '낙화(落花)'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