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분별 제3조는 ‘공동체 결정의 주체는 성령이시다’라는 것이다.

아, 성경 그리고 분별 (28)

 

공동체 분별의 원칙 3조 :  ‘분별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여기서 배우는 공동체 분별 제3조는 ‘공동체 결정의 주체는 성령이시다’라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 몇 가지 외에는 여러분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며 우리의 결정입니다”(행 15:28). 성령이 하시기 때문에 참석자 간의 일치가 가능해진다. 일치는 우리들의 찬 머리/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이 주시는 뜨거운 가슴으로만 가능하다.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가 결국은 만나게 되고,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모든 자들이 성령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변론 과정에서 발언과 조사는 자유롭게 이뤄졌다. 의견의 불일치가 분명해졌다. 누구는 목소리가 크고, 누구는 자리를 빈번하게 비웠다. 결정의 순간이 왔다. 이때 이그나티우스 성인이 알려준 분별 방법처럼 누구나 침묵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공동체 분별의 전 과정은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한다. 기도 없는 분별은 가능하지 않다. 기도하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다른 사람들이 했던 말을 상기하며,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결국 성령이 마음을 움직이는 대로 결정했다. 

이런 예는 사도행전 5장에도 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기적을 베풀자, 이를 시기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이들을 잡아와 공의회를 열고 심문한다. 사도들의 사역에 대한 공적인 분별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대중에게 사도들은 도리어 대담해진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새번역)라고 증언한다. 그러니 무서울 게 없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격분해 이들을 죽이려고 한다(행 5:33).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 일어나 침착하게 발언한다. 함부로 이들을 처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 이런 분별 과정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다(행 5:38-39). 사도들은 공식적 혹은 형식적 체벌을 당한 후 풀려난다. 그의 말은 옳았다.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오래갈 것이고, 인간들의 것이라면 곧 없어질 것이니 굳이 흥분할 필요도 없고, 부당한 폭력을 가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이 거기 있었던 이유, 그 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나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한 것, 그의 말을 따랐던 공의회의 멤버들과 참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을 기뻐하면서”(행 5:41, 새번역) 본인들의 사역에 자신감을 얻은 사도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이 그 자리에 계셨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동체 분별의 원칙 4조 : ‘공동체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 소개된 공의회의 공동체적 분별에서 배우는 마지막 네 번째 규칙은, ‘공동체의 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결과에 순종하는 것’이다. 앞의 모든 절차가 좋아도 마지막 단계인 여기서 그르치면 공동체의 분별은 허사가 된다. 실컷 모여 몇 날 며칠 고생고생해 가며 변론하고 의사를 조율하고 드디어 표결에 붙여졌고 결론이 나왔는데,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회의장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최소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사는 지역의 한인 목사들이 모여 초교파적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 개인의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고 급기야 말다툼으로 이어지고 한때 좀 놀았다고(?) 하는 어느 목사가 의자로 책상을 내리쳐 난장판이 된, 그런 천박한 모습이 최소한 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출신이 바리새인이건 사두개인이건 열성파이건 간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이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건 간에, 이 자리에 모인 모두는 15장 28절의 말씀과 같이 성령의 뜻과 공동체의 결정에 순종했다. 이런 과정에 누구의 강요도 없었고 옆에서 찔러 주는 점심값도 없었다. 회의 과정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을 수 있으나 끝은 평화로웠다. 본인의 결정이 관철되지 않은 데서 오는 회한이나 분개의 마음도 사라졌다. 도리어 결정에 기뻐했고, 분별의 대상이 된 바울과 바나바를 인정하고 격려했다. 안디옥의 회중을 격려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결정에 대한 확증으로 대표 몇 명을 이 둘과 같이 보내기로 한다. 공동체적 분별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다.

공동체의 결정에 대한 권위를 어떻게 인정할 건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주제이다. 권위는 어느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렇게 믿고 있는 현대판 제사장들이 많다는 것이다. 권위는 세워지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 사용되는 ‘특정한’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여기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해병대 정신은 통하지 않는다. 공동체적인 권위와 그 분별의 결과에 대한 권위가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이런 분별의 모든 과정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진행해야 한다.

이런 분별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분별에 참가하는 각 개인의 신앙적 성숙이겠지만, 굳이 리더십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라면, 이 분별의 과정을 잘 진행할 수 있는 진행자의 역할이다. 지혜로운 진행자가 있어야 공동의 분별이 매끄럽게 진행되고, 나아가 이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만들어진다. 진행자와 더불어 기록자의 기능 역시 중요하다. 분별의 모든 과정은 기록되어야 한다.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허튼 소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는 야고보가 이런 진행자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의 발언은 그 자리에 참석한 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올바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리고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는 요즈음의 회의 현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만장일치’였다.

잠시 만장일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장일치에 대한 흔한 오해는 ‘의견이 다 같아야 한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그들의 의견이 같았는가? 아니다. 지독하게 달랐다. 심지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정의조차 달랐다. 이게 우리의 분란의 시작이 아니던가? 

우리가 신앙 안에서, 공동의 분별 과정에서 추구하는 만장일치란 서로의 의견들이 상충한다고 해도(상충하지 않으면 도리어 문제다), 그래서 분별 과정이 혼란스럽고 힘들었다고 해도, 표결 결과에 일치된 마음으로 순종/순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표결이라는 물리적인(혹은 기계적인) 결과가 이래야 한다 혹은 반드시 만장일치로 나와야 한다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결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전적인 동의와 인정과 순종이지, 기계적인 표결의 만장일치는 아니다. 

공동체적 분별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 것은, 개인적으로 똑똑해지려고 분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순종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분별한다는 게 맞다. 영적인 유목민은 결코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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