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미국은 건국 초기에 국명을 ‘컬럼비아’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남미의 콜롬비아가 생기면서 그 자취만을 여기저기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 D.C.이다. 이른바‘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

그런데 D.C.가 어쩐지 200여 년 후 IT 산업으로 세계를 휘어잡을 Dot Com으로도 보이는 게 미국이 그 오래 전에 이미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수도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다.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자유와 희망의 꿈을 안고 세계 여러 곳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의 나라인 만큼 세계인의 나라로 이미 그 기틀을 마련한 거나 다름없어서이다.

그런데 애초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디언)을 보호 구역으로 몰아내고 지배하고 있는 다수의 백인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계 이민자들의 자손이다. 다만 그들의 조상들이 다른 이민자들보다 먼저 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득권이나 우월감을 내세워 정세와 필요에 따라 소수 민족 이민자들에 대한 정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경해 왔다. 

일찍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들어온 앵글로색슨족은 원주민(인디언)들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영역을 확장해 갔다. 루이지애나 지역대(地域帶)를 사들임으로써 땅을 곱절로 늘리더니 드디어 루이스-클라크 팀에 의해 서부 탐험의 기치를 내걸고 점점 넓히면서 ‘프런티어(Frontier) 정신’으로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그런가? 미국인들이 야구보다도 더 열광하는 미식축구가 꼭 이러한 선조들의 땅따먹기를 닮았다. 아마도 이 경기를 통해 조상들이 대륙을 정복한 개척의 기질이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아무튼 미국인들의 의식 구조에 자리 잡은 이 ‘프런티어 정신’은 점차 미개 지역과 문명 지역을 넘나드는 구실이 되었다. 그들 처지에서 볼 때 원주민(인디언)들은 미개지역에 사는 미천한 종족인 반면, 자신들은 ‘개척자(프런티어)’로서 서진(西進)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사명의 문명 선구자였던 셈이었다.

그래서 이를‘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대명제로 포장하고 더 나아가 새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예비해 주신 ‘평화의 땅’이라고 하나님까지 들먹여가며 합리화했다. 이런 배경에서 태생하고 성장한 만큼 미국 역사의 밑바닥에 ‘원주민(인디언) 인종추방’, 더 나아가 이질 집단에 대한 배척이 자리잡게 됐을 것이다.

어느 정도 원주민 문제를 마무리하자, 더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다. 아편전쟁 이후 패망한 중국과의 불평등조약을 비롯해 1853년 페리 함대가 일본을, 1866년 조선을 상대로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얼마 후 필리핀, 괌, 하와이 등의 태평양 주요 섬들을 점령했다. 

이제 그들의 대명제는 ‘문명화 순응과 복종’이라는 책임 의식으로 개명되고 아시아인 차별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활용됐다. 이는 중국인과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대한 심한 차별로 이어졌다.  

미 동부와 서부에 건설된 기존의 철도 일부 노선을 대륙 간으로 연결하는데 남북 전쟁으로인해 흑인들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중국으로부터 소위 ‘쿨리(苦力)’라 불리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그 결과 이들의 피와 땀, 눈물로 미 대륙간 횡단철도가 완성되었지만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 1882년)’으로 이민이 중단되고 이들은 버려졌다. 이외에도 중국인 이민 금지(1875년), 아시안 직업 제한(1902년), 아시안 토지 소유 금지(1913년) 등이 연이어 자행됐다.

▲ 1901년 11월 20일, “중국인 배척 협약”을 1면에 다룬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콜(The San Francisco Call), 사진출처: Wikipedia, Creative Commons License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계 이민자들에 대한 강제격리수용이 있었다. 이로 인해 1944년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코레마츠 케이스’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뼈아픈 오점의 역사로 남았다. 그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직후 12만 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했던 조치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 중 3분의 2 이상이 미국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이었음에도 적국인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하는 등 미국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이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조치로 일본계 미국인들은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을 잃은 채 황량한 사막과 황무지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적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강제수용을 당하지 않았다)

코레마츠가 제기한 소송으로 결국 미국은 이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사과했지만 대법원은‘강제 억류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 이러한 아시아인 차별은 1965년 이민법이 시행되고 동아시아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소수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진화했다.

그러다가 차별은 2001년 9·11테러 참사 이후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해, 2002년 유학생의 정부 등록 의무화와 국경검색을 강화하고, 2005년엔 운전면허증 발급을 제한하는 리얼아이디(Real ID) 법안이 통과되는 등 전체 이민자 커뮤니티를 향한 차별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인종차별의 토대 위에서 미국은 또한 팽창도 해왔다. 그런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 최강이 되고 세계 규범을 주도하게 되면서 소수인종, 특히 인디언, 흑인,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을 어느 정도 은폐한 채 묵인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코로나19’여파로 아시아 인종 증오 발언이나 차별 공격이 표출되고 심화되면서 미국 사회가 소란스럽게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비단 이번‘코로나19’만이 아시아계 미국인을 타깃으로 삼게 된 공중 보건 위기는 아니다. 1876년 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아시아계가 지목됐고, 190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선(腺)페스트(bubonic plague)’가 발생했을 땐 차이나타운 중국인들이 격리됐으며, 2003년 사스(SARS)가 유행했을 때도 아시아인들이 낙인 찍히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들은 질병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무언가 비난할 대상을 찾기 때문이라는 데, 오래전부터 아시아인에게는 병을 옮기는 불결한 사람들이란 이미지가 씌워져 있어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무분별한 지도자의 언행이나 언론의 책임 또한 크다. 그러니 무엇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근본적인 정치철학 및 법적 제도의 혁신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마침 3월 21일은 UN에서 선포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부디 미국은 목전지계 (目前之計)의 미봉책이 아닌 진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제도 마련과 함께 정신 재무장으로 워싱턴 D.C.가 ‘차별의 나라(Discrimination Country)’라는 오명을 벗고 ‘신곡(神曲: Divina Commedia)’이 말하는 정화(淨化)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하는 바른길이라 본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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