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 고아원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 고아원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 고아원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이다. 항상 돈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정부 예산으로는 고아원을 운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돈으로 후원하는 것은 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떡을 해가기도 하고 빵을 사가기도 했다. 여러 물품이 섞인 선물꾸러미를 만들어 가져다 주기도 했다. 그곳을 운영하시는 분들과 친해지니 그분들이 돈을 원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만 원을 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을 그분들은 천 원이면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후에는 가급적 돈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돈으로만 하는 후원은 여전히 흡족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떡볶이도 만들어 주고 최고급 등심 요리도 해주었다. 일 파운드짜리 버터를 통으로 몇 개씩 집어넣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내가 만들어 준 것을 먹는다는 사실은 돈으로 후원했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그렇다. 돈은 내 몸을 대신할 수 없다. 나는 그때 몸으로 하는 봉사와 헌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최근 신림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입간판 하나를 보았다. 65세 이상 어르신 이발비가 3천 원이라는 안내판이었다. 몇 걸음 지난 후 되돌아가 내용을 확인한 후에 미장원을 찾아갔다. 확인해 보니 입간판 내용대로였다.

다음 이발할 때가 되어 그곳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곳이나 앉으라고 했다가 혹시 내가 65세 이상 어르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확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아 머리를 깎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전에는 종로 3가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곳에서는 깎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5분 정도인데 이곳에서는 이십 분 이상 걸렸다.

나는 삼천 원을 내고 머리를 감아 주는 것이 황송해서 머리를 감지 않겠다고 했다. 종로 3가에서도 머리를 감지 않았다. 진공청소기로 머리를 털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머리를 감지 않고 이발을 마쳤다. 나오면서 3천 원을 내는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3천 원을 내면 되냐고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두 달여가 지났다. 다시 머리를 깎아야 할 때가 되었다. 문득 내 머리를 깎아준 사람이 초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발 연습의 실험자가 된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좋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길에 5천 원짜리 이발하는 곳이 생겼다. 그곳을 찾아갔다. 가격표를 보니 선전 간판대로 5천 원이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사람이 없었다. 삼십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 3천 원짜리 이발을 해주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도 다른 곳에 앉히려다 혹 내가 65세 이상 어르신이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나를 예전의 그 자리로 안내했다. 이번에 이발을 해준 사람은 두 달 전에 해준 사람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이번에도 머리를 안 감겠다고 하자, 이발 해준 사람이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머리를 안 감겨드리면 원장에게 야단을 맞는다고 했다. 

이번에는 머리도 감았다. 성의껏 머리를 감겨 주어서 더 미안했다. 머리를 감고 자리에 앉아 머리를 다시 깎았다. 그런데 실장님이라는 사람이 와서 머리 깎던 사람을 밀어내더니 전체적으로 머리를 다시 깎았다. 머리를 잘못 깎아 놓았던 것이다. 결국 내 머리는 아주 짧아졌다. 

이발비가 싼 것은 초보자들의 연습용으로 나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실험용 쥐(마못)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나오는데 처음에 머리를 깎아 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의 눈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 이 사람에게 내가 필요하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이 사람도 숙련된 미용사가 될 수 있다. 내 머리를 깎아 준 사람의 눈빛에서 세상에 시달린 흔적을 보았다. 미용사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그 나이까지 그 사람이 살았을 험한 세월이 느껴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오랜 삶을 살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어떤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도 그곳에 갈 것이며 그들에게 편하게 머리를 깎으라고 말해 줄 요량이다. 사실 미용을 위해 머리 깎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길면 보기 싫고 지저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잘 생겨 봤자 보아줄 사람도 없다. 나를 내세울 이유는 더더욱 없다. 어차피 나는 거지 목사(내 이름을 검색하면 거지 목사라는 제목의 내 글이 가장 먼저 뜬다)가 아닌가. 거지 목사가 할 수 있는 적합한 일이 아닌가. 누군가 내 몸을 이용해 살 길을 찾는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곳을 이용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 찬송가 가사가 생각났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을 준다는 것의 의미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주님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생생하게 나를 교육하신 것이다. 몸을 준다는 것의 의미를 주님은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오래 전 고아원을 드나들며 느꼈던 것이다. 주님이 다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제 몸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건강에 주의하는가. 먹을 것 하나에도 얼마나 신경을 쓰는가. 미용은. 그래서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하고 옷도 사지 않는가.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자신도 모르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를 보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돈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게 몸으로 다른 사람을 위할 때 우리는 몸을 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일은 돈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또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생각난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실감이 난다. 이것이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돈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 기적이 사라진 것은 우리가 한사코 부자가 되려 하고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인 주변에서 더 이상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몸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 사람들이 떠메고 다녀야 하는 그 사람을 손으로 잡아 일으켰다. 우리가 몸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이 나를 미용실로 인도하셨다. 주님이 나를 몸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불러 주셨다.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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