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나는 참 위험한 사람이다. 나는 기존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을 주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길을 가다 보면 점점 더 자아가 강해진다. 나의 옳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옳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옳음을 믿지만 확신하지는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의문이 일 것이다. 나는 내가 주장하는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절대적으로 적용할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깨달아 안 것은 나의 것일 뿐이다. 나는 나의 깨달음을 최선을 다해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그 실천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다른 깨달음이나 더 큰 깨달음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처음 깨달음과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결국 나의 깨달음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바람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 한다. 그러려면 내가 무거워져서는 안 된다. 어느 순간 나는 나 자신이 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것은 매우 찰나적이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나는 나 자신에게 매료될 수 있고, 어느 순간 군림하려는 존재가 된다. 때론 주님이 그것을 시험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이단이 되는 순간이며 교주(왕)가 될 길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렇다 나는 언제든 교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사람이다. 인간은 작은 성공에도 함몰되는 존재이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이루는 순간이 위험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습관이 들기 시작한다. 이것이 신격화의 시작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들도 바로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그 과정을 거쳐 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이 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성이다. 정말 찰나이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적그리스도가 된다.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이순화(정도교 교주)를 정점으로 하는 이단들의 계보를 보았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들도 보았다. 사람을 능히 홀릴만하다. 거기에 작은 영적인 능력이라도 더해지면 하나의 종교로 탄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악령의 존재를 믿는다. 악령도 능력이 있다. 악령은 자기 자신에게 함몰된 인간들에게 능력을 더해준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교주가 되거나 대형교회의 목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빌립보서에 수록된 '그리스도 찬가'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히 불러야 할 찬송시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바울의 창작물이 아니다. 이 찬송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애송하던 찬송 시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찬송을 하며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위험들을 극복했다. 말하자면 자기 비움과 낮아짐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임을 그들은 알았다. 그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성령이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이 간단한 역사가 초기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답게 만들었고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자기비움과 낮아짐이다. 자기비움은 어리석은 자기비하이며, 낮아짐은 하나님 사랑의 결여로, 그리스도인들의 이해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대성당들이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안을 채우는 것은 화려한 예술품들이었다. 물론 성직자들과 예술가들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이 그 일을 겸손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무언가 작품을 남긴다는 것, 무언가 족적을 남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왕의 대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적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도 몰랐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커진 만큼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글을 읽는 분들이 지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또 다시 가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난이야말로 자기 비움과 낮아짐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길이다. 가난해지면 채울 수가 없다. 물론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난한 목사를 존경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무식한 목사를 존경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대목에서는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무식은 자신의 옳음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 태도이다.

실제로 가난을 경험해보라. 가난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가난하기 때문에 당하는 무시와 멸시는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보라. 생각지 못했던 평안이 찾아온다. 그 평안이야말로 자기를 비울 수 있게 해주고 기꺼이 낮아지는 것을 감사로 받게 해주는 은혜이다.

나는 환난을 자랑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마음의 평화도 공감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비움과 낮아짐의 은혜를 마침내 배운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이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형편없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이다. 누추한 것이다. 궁상맞은 것이다. 구질구질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자족의 비밀이 되고 약할 때 강함이라는 탄식을 불러온다.

교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어느 순간 그들이 왕으로 등극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대형교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대형교회 목사는 왕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왕이 무엇인가.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이다. 어느 순간 너무 옳고 너무 커진 그 사람들은 갈 곳을 잃는다. 그들이 갈 곳은 하나님의 자리이거나 그리스도의 자리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적그리스도가 된다.

통일교주 문선명은 세계위인대사전에 수록된 세 사람의 한국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왜 그런 그를 존경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는 존경하지 않는가. 그와 함께 수록된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왜 그를 존경하지 않는가.

사람은 자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욕망은 그것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욕망의 존재가 된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은 돈이다. 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가난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욕망과 돈은 생명처럼 인간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돈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솔직하게 자신을 성찰해보라. 그리고 오늘 인용한 ‘그리스도 찬가’를 묵상해보라.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부를 것이다. 그분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도 따라 높아지려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정말 그분을 높임으로써 자신은 낮아지려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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