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목회 (11)

선교사는 마치 산악 구조대원과 같은 선악 구조대원입니다. 어둠과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길에 빠져 옳은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찾아 선과 악을 바로 알려주고 구조해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악 구조대원인 선교사에게는 안전장치가 필요한데, 바로 보내는 선교사인 누군가의 기도와 물질과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작은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 감사 예배를 드리며 “쓸 때는 성전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피와 땀과 눈물이라고 읽습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저 역시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우리 교회가 건물도 작고, 성도 수도 적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이 크기에 우리 교회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라는 믿음과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준비된 만큼 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쌓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책이 쌓이고 서류가 쌓이고 그 위에 먼지가 쌓입니다. 지치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결국 내려놓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모든 것은 언젠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맡겨진 모든 것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기쁨과 감사 아니면 결국 우리의 눈과 마음에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변화된 심령으로 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위해 몸부림칩니다.

인생의 고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찾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의 고난과 아픔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 고통이 변하여 은혜가 되었고, 감사와 찬송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허비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고난 가운데 있는 누군가를 위로하게 하십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 ‘섬김’을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아내가 “왜 목사 부인을 사모라고 할까? 차라리 식모라고 하면 괜찮은데”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개척 교회 사모의 역할이 식모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어서 아내가 “차라리 식모라고 하지 사모라고 부르며 식모처럼 일을 시켜.”라는 말을 하는데, 아내의 온갖 고생과 스트레스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를 알고 행하는 자가 복되기 때문입니다. 사모를 식모로 여길지라도, 주님이 친히 본을 보이신 섬김의 도를 알고 행함으로 참된 회복과 축복과 행복을 고백하며 누리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2014년 2월, 서울의 모 교회에서 부족한 저를 청빙하는 문제로, 한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당회 장로님들과 대화도 나누고 어느 정도 결정이 된 상태에서, 5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세계 선교 대회에 참석하고 5월 마지막 주일에 아내와 하께 인사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교대회 전에 건강 검진을 받기로 예약해 놓았는데, 검진 이틀 전에 아내가 약간 이상했습니다.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 이름을 모르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멍한 증세를 보였는데, 검진 결과 뇌경색이라고 했습니다.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빨리 미국으로 들어가자는 아내를 설득해, 아는 지인을 통해 강북 삼성 병원을 소개받고 바로 입원시켰습니다. 담당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없고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뇌출혈 집중 치료실에서 8일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빠른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해주셨습니다.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그 이름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신다는 믿음으로 무엇보다 열심히 준비하며, 그때그때 주시는 은혜와 맡겨진 배역대로 작은 일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말씀하시며 주님이 계수할 만한 시간들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7년 10월 1일(주일) 오후 10시, 라스베가스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59명 사망, 500여 명 부상), 작은 아들 태영이가 출장 가서 사건 현장 맞은편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사건 발생 시각에 태영이가 호텔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밖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이 소리치며 호텔 안으로 달려 들어와 얼떨결에 숨는다고 들어간 곳이 화장실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곳에서 제게 전화했습니다.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아빠! 사랑해. 아빠! 기도해줘. 여기 총격 사건이 일어났어”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습니다. 

TV를 틀어보니 라스베가스 총격 사건에 대한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고 아들에게선 연락이 없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아들과 같이 화장실에 갇혀 있는 느낌으로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하나님! 큰 아들로는 부족한가요 하나님! 우리 태영이 살려 주세요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안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시간 후, 아들이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에 있는 자동판매기 사이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또 2시간 뒤에 아들이 호텔 방에 들어왔다고 연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들은 “형이 죽고 나서 자신도 죽을 준비가 되었는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닌 것 같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열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제목은 많아졌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들 물질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육신의 질병과 자녀 문제 등으로 이 모양 저 모양의 아픔을 호소합니다. 기도 제목은 늘어만 가는데, 아프고 힘든 만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반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그나마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 시간(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 앞에서, 물질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남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자기 기도에만 급급한 게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하는데, 부르짖는 기도보다는 편하게 땀도 흘리지 않는 묵상 기도를 선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도의 불은 점점 식어가고 그 화력이 약해져 그 누구도 따뜻함으로 녹여 주지 못하거나 세상 불에 의지하여 기도의 끈마저 놓아버린 이 시대에 기도의 용사를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 들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계속)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