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는 자의 기도 1

박준형 칼럼니스트(캐나다)

사람들이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이 기도의 힘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설명하기 힘든 종교적인 행위 역시 기도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가 한결같은 세상의 반응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고통 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고통 받고, 여전히 살아야 할 사람이 죽고, 여전히 행복해야 할 사람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조차 못 느끼고 기도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막연히) 걱정하고 염려하고 한탄할 뿐이지요. 혹 바라는 것이 있으면 열심히 그렇게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사를 결정할 때 보이는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염려와 걱정과 기우만으로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지독하게 머리를 쓰던가.

그러다가 잘 되면 운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수 없는 것으로 끝납니다. 운이 좋으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아니면 못 들어가고, 운이 좋으면 아파트 당첨이 되는 것이고 아니면 떨어지는 것이고, 운이 좋으면 병에서 회복되는 것이고 아니면 죽는 것이고, 모든 게 운에 달려 있습니다. 운과 염려와 걱정의 세 바퀴 속에서 세상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꿍짝꿍짝꿍짜작꿍짝 세 박자 속에” 송대관의 노랫말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분별이 이런 세상적이고 운명론적인 의사 결정의 태도와 다른 것은 기도하기 때문이고 기도의 힘을 (확고히) 믿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예수회의 ‘분별’ 선생인 토마스 그린은 그의 명저 『밀밭의 가라지』를 통해 ‘분별은 기도와 행동이 만나는 곳에서 이뤄진다.’고 정의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분별에서 기도가 없으면 그것은 추상이나 기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마 6:31)”고, 대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걱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마 6:27,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의 것으로 충분하다”(마 6:3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분별하는 자가 고민할 것은 이제 어떻게 기도해야 되지, 뿐입니다. 분별하는 자의 기도는 어떤 것인가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야고보서 1:5의 말씀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파트도, 학교 입학도, 취직도, 리무진이 동원되는 장례 행렬도? 

아닙니다. 우리가 분별하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좋은지 하나님으로부터 확증 받기 위함입니다(롬 12:2). 어떻게요?

하나님으로부터의 확증은 우리의 일방적인 기도와 탄원(주시옵소서!) 아니면 윽박과 협박(안 주면, 만약에)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옵니다. 따라서 분별하고자 하는 자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청원’이 아니라 ‘묵상’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입과 머리만을 사용해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바람/집착에서 자유로워지고 대신 새로운 마음,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채워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듣고 그는 말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바라는 묵상의 1차적인 목적입니다. 내려 놓고 듣는 것!   

“주님, 저는 지금 주님의 현존을 구합니다. 저의 산만한 마음/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당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당신의 발 앞에 저를 내려놓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영으로 저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아멘.” 

이렇게 하여 혹 계시되거나 얻어지는 마음의 영감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이 마음에 ‘곰곰이 새기는 것’이 묵상의 2단계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된 말씀이,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저 그 영이, 그 말씀이 행하시는 대로 쓰이는 빈 용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이게 분별하는 자의 기도이고 분별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래서 결국 당신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소서.’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소위 성인의 반열에 든 사람들이 기도해 왔습니다. 그들은 결코 (쉽게) 얻기 위해 빌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만을 죽기까지 바랬습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이 세상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의 ‘의탁의 기도’ 중에서)

그러니 분별하는 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더욱 더 성숙해지기를 소원한다면, 말을 줄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안 계시고, 불이 사라진 후에 ‘세미한 소리(gentle whisper)’로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열상 19:11∼12)! 이게 퀘이커 영성의 대가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하는, 21세기의 저주인 피상적인 삶이 아니라 깊어지는 삶, 영성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침묵하고 경청하는 것! 

교회사학자이자 목회자인 배덕만 교수 역시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주여삼창, 통성기도, 방언기도로 상징되는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여 영적 카타르시스는 경험했지만, 진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기도의 기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길게 한다고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실 거라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 짧고 자주하는 지혜를 터득하십시오. ‘마라나타(주여, 오소서)’’라는 아람어 한 단어에 우리의 모든 기도가 다 포함됩니다. 일방적으로 주문/주장하지 말고 대화하십시오. 하나님과 우정을 쌓으십시오. 그럼으로 우리와 주님이 분리된 삶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사시고 일하신다는 일체감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분별은 결국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직접” 하신다는 것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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