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지음 / 창비 펴냄(2021)

 

소설가 신경숙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지난 3월에 출간되었다. 2020년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매거진 창비’에서 연재한 작품을 수정·보완했다.

한국소설에서 그간 다루어지지 않았던 ‘아버지’를 그려낸 이 소설은, 엄마가 입원하자 J시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나’가 5년 만에 기차에 오르며 시작된다. J시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지나온 삶이 겹쳐지며, ‘나’는 시나브로 아버지의 삶속으로 들어간다. 한국전쟁부터, 돈을 벌기 위해 올라간 서울에서 목격한 4·19혁명, 자식 여섯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소값이 폭락하자 그 소를 타고 참여했던 80년대 소몰이 시위까지, 70년의 한국현대사가 아버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다른 아버지 ‘큰오빠’가 겪은 80~90년대 중동 이주노동,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이제는 치킨 두 마리도 마음 놓고 시키지 못해 미안해하는 조카 등은 시대마다의 아버지를 보여준다.

한편 ‘나’는 몇 년 전 사고로 딸을 잃었다. 뼈아픈 상실을 계기로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고통과 대면하며 “아버지를 한 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다. 그러면서 둘째 오빠와 엄마, 아버지와 함께 전쟁을 겪어낸 ‘박무릉’ 등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려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삶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마침내 가족의 지난 시간과 멈춰 있던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한다.

작가의 말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한 이 허름한 아버지는 처음 보는 아버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개별자로 생각하는 일에 인색해서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아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내고도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는 이 말수 적은 익명의 아버지를 쓰는 동안 쏟아져나오는 순간순간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먼지 한 톨로 사라질 이 익명의 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가서 이제라도 그가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죄다 알아듣고 싶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참나무 밑에는 참나무 잎이 지겠지요. 가까운 아래 지느냐 저만큼 날아가서 지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설마 여기 있는 참나무 잎이 저기 다른 산의 잣나무 밑에 가서 쌓이겠는가요.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 설 때면 으깨진 마음으로 이 소설 속의 J시를 생각하며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게 J시와 독자들은 대자연 같은 의미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그 품에 의해 제가 구해지는 때가 적잖았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곳에 듬성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담기기도 했습니다. 나이 든 잎사귀, 젊은 잎사귀 들이 바스락거리면서 참나무를 돌보는 것을 지켜보는 시선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 안에 스며 있기도 합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떤 참나무 한 그루에게 바치는 서사시라고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신경숙 작가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겨울 우화」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짧은 소설집 『J이야기』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자거라, 네 슬픔아』와 한일 양국을 오간 왕복 서간집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 등을 펴냈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을 비롯해 41개국에 번역 출판된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작품이 영미권에서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외딴방』이 프랑스의 비평가와 문학기자가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을, 『엄마를 부탁해』가 한국문학 최초로 ‘맨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본문 중에서)

언젠가 내가 아버지에게 당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응수하자 아버지는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고.(7쪽)

너그들이 먹성이 얼매나 좋으냐. 양석 걱정 없이 살게 된 지가 얼마나 되간? 오늘 저녁밥 먹음서 내일 끼니 걱정을 하며 살었는디. 밥 지을라고 광으로 쌀 푸러 갈 때 쌀독 바닥이 보이는 때도 있었는디. 그 가슴 철렁함을 누가 알겄냐. 쌀독은 점점 바닥을 보이는디 먹성 좋은 자식 여섯이 마구 달려들어봐라, 안 무서운가……아버지가 삼킨 말을 대신하는 동안 무거워진 생각을 털어내듯 엄마는 곧 생기를 되찾곤 했다. 무섭기만 했시믄 어찌 매일을 살겄냐. 무섭기도 하고 살어갈 힘이 되기도 허고……(196쪽)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 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323쪽)

나는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려고 한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먼 이국의 사람들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데 나는 내 아버지의 말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아버지 뇌만 기억하도록 두었구나, 싶은 자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라고 해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딸이 되어주었으면 수면장애 같은 것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373쪽)

우리가 언지 또 보겄냐, 뭣을 허든 너도 잘 마치고 와라잉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아버지가 힘을 내서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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