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 참 신비롭다. 소리는 같아도 뜻이 다른 우리말이다. ‘빛’을 생각하다가 ‘빚’이 떠올랐고 가까이에 ‘빗’이 있었다. 이 글은 ‘빛’과 ‘빚’과 ‘빗’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생각할수록 내면의 소리로 여겨진다. 스스로 일깨우며 가르친 셈이다.

당대 최고의 미남이었던 한 원로 배우의 일상을 우연히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그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거울 앞에 섰다. 물끄러미 얼굴을 보며 엉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빗’으로 가지런하게 빗었다. 그 모습이 사뭇 경건하게 다가왔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기적이며 생명인 까닭이다. 그렇게 행동으로 그 진실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분은 배우다. 조연(助演)이 아닌 주인공으로 하루를 살겠다는 진정한 연기(演技)였다. 먼저 자기 몸을 살피고 그 마음까지 흐트러짐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일깨움이었다. 모름지기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의 주인은 바로 나이다.

외출할 때 나에게 ‘빗’은 필수품이다. 머리숱이 적은데다 늘 빛나는 넓은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으면 머리 꼴이 엉망이다. 수시로 남은 머리를 빗어야 그나마 흉한 꼴을 면한다. 내 약점 중의 약점이다. 가발을 쓸까 말까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은 위장(僞裝)이라는 선입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발 쓴 사람들의 조언은 의외로 긍정적이다. 자존감이 높아진다나? 그 말에 솔깃하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우유부단함은 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랴! 이 슬픈 자화상을.

‘빚’ 지고는 못 산다. 내가 경험한 ‘빚’은 자초한 것이었다. 내 딴에는 보람이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아픈 과거를 딛고 다시 일어나 새 출발 하는 한 형제가 도움을 요청하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쉽게 말해 보증을 섰다. 그는 목돈을 대출받고 적금을 부어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착실히 갚아 나갔는데 그 일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보증인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절반도 못 갚고 물러섰다. 보증인의 몫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그때부터 졸지에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한다. 사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사랑만 앞세우고 지혜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잠잠히 깨닫게 된 믿음의 진실은 이웃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주는 다함 없는 사랑이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도 그렇다. 누군가 내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었기에 나는 복음에 빚진 자가 된 것이다. 금보다 귀한 깨달음이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8).

언젠가 기독교 월간지 「빛과 소금」에 예기치 않은 혼란이 일어났다. 제목 때문이었다. 어느 성경적인 식견을 갖춘 분이 문제를 제기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 5:13)라고 말씀하셨고 바로 다음 구절에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마 5:14)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이 먼저 나온 까닭이다. 곰곰 생각해보아도 ‘소금’이 되어야 ‘빛’이 되는 원리이다. 

급기야 잡지의 제목을 바꾸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원래의 제목인 ‘빛과 소금’으로 환원되었다.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한 어감(語感)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론 나도 ‘빛’이란 말 속에는 ‘소금’과 분리될 수 없는 복음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빗’이 행실이라면 ‘빚’은 마음이요 ‘빛’은 영혼이 아닐까. 빗과 빚과 빛 속에 이런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마땅한 삶의 태도일 터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누가복음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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