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명예를 중시하고 모욕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러나 명예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의를 사랑하며, 모욕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가를 보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도 인간이 아이러니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명예가 있고 모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예와 모욕은 사회적 신분과 관련된 매우 제한적인 사람들에게나 허용되는 단어들이다. 얼마 전 아파트 경비원의 이야기가 보도된 적 있다. 젊은 청년이 나이 든 경비원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심지어 침을 뱉고 때리기까지 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그 청년을 무례하고 못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청년의 입장에서 보면 경비원은 노예다.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고용한 노예다. 노예에게는 모욕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 시대에도 노예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 무례한 젊은 청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명예 역시 마찬가지다. 명예를 지키는 결투는 귀족들에게만 허용되었다. 평민들에게는 결투가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평민들에게는 명예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관행과 관습이라는 법이 존재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을 불의하다고 인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처럼 인식하지 못하지만 계급이 있고, 계층이 존재한다. 아무리 유리천장을 외쳐도 그 유리천장 너머에 또 다른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이것을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문명의 정상성’으로 명명한 바 있다. 실감나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처럼 하이어라키를 구성하고 그것을 정의와 질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신분 상승을 위해 사람들이 돈에 천착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제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의 김제덕이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제덕은 가난한 집 아이다. 이제 그가 돌아오면 많은 광고 제안이 들어올 것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맞다. 그럴 것이다. 그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노예로부터 명예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귀족이 될 것이다. 금메달이라는 명예와 그 명예를 지지해 주는 돈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바울이 살았던 사회는 현대 사회처럼 암묵적 노예가 있는 사회가 아니라 노예제도가 기반이었던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은 자신이 노예임을 선언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라 지칭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에게 낙인이 있다는 사실도 공표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니고 다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읽고 예수의 상처 자국(스티그마)을 '오상'이라는 이름으로 흠숭한다. 원어로 보면 그것은 낙인이다. 그의 말처럼 예수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비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낙인이며 노예의 표시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장 천한 노예로 살 수 있다. 그것을 영적인 신비로만 이해하면 우리는 그가 말하고 있는 노예로서의 삶을,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상실하게 된다.

노예가 된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명예로운 삶이 아니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영적 거장으로서의 존경 받는 삶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는 자매와 형제 된 그리스도인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제 맘대로 모욕할 수 있는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이 문장을 천천히 묵상해 보라. 이것이 바로 노예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로 치면 노숙자와 같이 살았고, 그의 삶은 당시 노예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명예와 모욕 자체가 없어진 노예로 살았다. 그런 노예들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노예가 되어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노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꿈꾸는 것이 무엇인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얻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이 바로 이런 것들이 되지 않았는가.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을 일컬어 ‘주의 종’이라면서 자신을 치켜 올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 노예가 아니라 가장 천한 이방인 노예가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가장 천한 노예가 되어 이 시대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찍힌 후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못 견뎌했던 모욕이 노예 된 나에게 당연한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내게서 명예가 사라졌다. 더 이상 모욕도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이다.

바울의 이 말은 대형교회 목사가 되었을 때, 고위직 성직자가 되었을 때, 세상의 대인이 되고, 수상의 영광이나 성공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오직 예수님처럼 가장 비천한 이방인 노예가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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