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영락교회 담임

누가복음 4:21-30

사회운동가 줄리아 워드 하우가 쵤스 서머 상원의원에게 유권자 중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상원의원은 답변했습니다. “줄리아 씨, 제가 요즈음 국사에 너무 바쁘다 보니 개인사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줄리아가 대꾸했습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군요. 하나님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신데요.”
상원의원은 스스로 선택받은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나사렛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4:22). 그러나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4:24).
예수님은 소망과 해방의 메시지가 선택받은 소수 특권자만이 아니라, 메시아의 구속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의롭고 메시아와 직통한다는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특권적 메시아 사상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유대인이 원수로 여기는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무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4:29-30).
예수님이 우리를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도 엘리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엘리트는 세상의 소수 특권층이 아닙니다. 돈 많이 번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엘리트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섬기는 종들입니다. 주님의 표준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실패라고 하시고, 안전이라고 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시고, 약하다고 하는 것을 강하다고 하시고, 미쳤다고 하는 것을 지혜라고 하십니다.
수태 고지를 받은 동정녀 마리아는 이렇게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1:46-47; 51-54).
오늘날, 우리는 굶주린 지구상에서 한 작은 풍요의 섬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 특권층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엘리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14:1).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이 주시는 풍요한 삶을 경험하려면, 모든 면에서 친절과 자비와 동정과 용서와 관용, 곧 사랑으로 사명을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 엘리트입니다.
달에 착륙한 세 우주인 중 한 명인 러스티 슈바이카트는 귀환 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주공간을 날며 내려다보는 지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 후 지구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태도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세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곳에 왔나?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어떻게 여기 왔습니까? 성경은 인간 창조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발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사랑의 신비가 밝혀지고 완성되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엘리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도의 성인 간디는 생각을 쉽게 바꾸곤 했다고 합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철석같이 말씀하신 지 겨우 한 주일 되었는데 말씀과는 영판 달리 행동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 때 보다 지금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좀 더 잘 알기 위해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좀 더 잘 행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자비와 긍휼과 친절과 용서와 관용의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 모였습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