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진 목사, 오렌지카운티 영락교회 담임

누가복음 22:14-23:56

성경은 그리스도의 외모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큰지 작은지, 홀쭉한지 뚱뚱한지 모릅니다. 체형도 걸음걸이도 모르고, 피부가 흰지 검은지, 뼈대가 굵은지 가는지, 근육질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깔도 모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감정은 아주 자세히 말해줍니다. 그는 침착하면서도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분이셨습니다. 
사단의 짓궂은 시험에는 분노하셨고, 이적과 기사가 당국자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보고 놀라셨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할 때 속상해 하셨습니다.
굶주린 채 따라다니는 무리를 안쓰러워하셨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며 눈물지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뻐하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고 번민하셨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자신을 숨김없이 들어내십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감정을 사실대로 전하려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감정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가 “겸손의 종”“남을 위한 사람”“선한 목자”“사랑의 사람”임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권력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통치수법을 송두리째 바꿔야 했으므로 두려웠고,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매도했습니다. “이 사랑의 사람은 공공의 적이다. 무정부주의자다. 우리는 그의 파괴적 혁명운동에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구를 매수하여 그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사랑의 사람은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엉터리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람이 십자가에 죽은 후, 적들은 새로운 문제를 만났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나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아무도 사랑의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랑의 사람이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신다는 것이 사실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고, 아름답고 평화롭고 조화와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랑의 사람을 따라 살면, 우리 모두가 함께 할수 있고, 증오와 공포와 이기심과 배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에 가슴 떨리는 감동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면 공포, 증오, 이기심, 배반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누구며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면,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온전케 하려고 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사랑의 왕국과 세상 왕국이 마주섰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타협을 거부했고, 세상 왕국과 사랑의 왕국이 충돌한 끝에, 세상 왕국이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사랑의 왕국은 조롱당하며 매달린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오늘 우리는 죽은 왕의 추모가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축하하러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우리가 구속 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왔습니다.
우리도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자가 되도록 구속 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사랑은 벽을 모릅니다. 그리스도가 증오와 적대의 벽을 깨뜨리신 우리의 평화이신 것입니다.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에게,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고 권면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사랑의 사람” 그의 고난 이야기를 듣고 가슴 벅찬 감동을 느껴본 것이 언제입니까?
지금 여기서 생생히 맛볼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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