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테니스 경기장
윔블던 테니스 경기장

김학천(치과 의사, 수필가)

모든 스포츠 가운데 유독 테니스만이 갖고 있는 재미난 단어가 하나 있다. 점수를 내지 못했을 때 ‘0’이라 하지 않고 ‘러브(Lov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왕후, 귀족의 놀이에서 유래된 테니스 게임에서 ‘0’의 모양이 계란과 비슷하기 때문에 프랑스어로 ’l’oeuf(뢰프)’로 불렸던 것이 영국으로 넘어가 ‘러브’로 바뀌었다고 하는가 하면, 스코틀랜드어로 ‘0’을 나타내는 lafe(라프)의 옛날 고어인 ‘로브(loove)’에서 ‘러브’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테니스와 러브의 커플링 같은 영화가 문득 생각난다. 2004년에 나온 영국 영화 ‘윔블던’이다. 한때 상위권이었지만 세계 랭킹 하위권으로 밀려난 후, 돈 많고 할일 없는 부인들 클럽의 테니스 코치가 될 생각을 하는 처지로 전락한 30대 초반의 노장이 우여곡절끝에 다시 윔블던 대회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착오로 세계적 스타의 객실을 방문하여 여기서 사랑과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이는 테니스 최강 커플로 알려진 안드레 애거시와 슈테피 그라프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16세에 프로로 데뷔하여 US 오픈과 호주 오픈 등 경기를 석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애거시는 한때 슬럼프에 빠지면서 랭킹 110위 밖으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오픈 우승으로 재기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테니스의 여제 그라프를 만나 재혼한 것이 일견 닮아서이다.

아무튼 세계 테니스 대회는1877년 윔블던 창설을 시작으로, 4년 뒤 US오픈, 그로부터 10년 뒤 프랑스 오픈, 그리고 다시 한참 후인 1905년 호주 오픈이 시작되어 4대 메이저 대회가 되었다. 그런데 각 대회마다 나라 이름이 붙은 것에 반해 영국의 윔블던 공식 명칭은 그냥 ‘The Championships’이다. 나라 이름조차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세상에서 이것만이 유일무이하고 최고라는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어째 오만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 '윔블던''의 한 장면
영화 '윔블던''의 한 장면

그럼에도 윔블던 테니스대회는 145년을 넘은 오랜 전통과 권위, 독특한 규정, 고색창연한 코트와 녹색의 잔디 여기에 영국 왕실의 색인 자줏빛으로 이루어진 윔블던이 만들어낸 분위기를 자랑하는데 전 세계 테니스인들의 로망이다.

이 중 그 오랜 역사 만큼이나 몇 가지 독특한 전통 중 하나가 변치 않는 ‘흰색’ 의상이다. 윔블던은 출전 선수들에게 흰색 유니폼만을 허용하는 엄격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티셔츠와 반바지, 양말뿐 아니라 신발에 안경까지 온통 흰색 일색이다. 신발 바닥까지도 흰색이어야 한다. 심지어 여성 선수들의 스커트 아래 입는 속옷이나 어깨로 드러나는 브래지어 끈까지도 논쟁거리다.

미국은 이 전통을 오래 전 폐지했지만 윔블던은 변함이 없다. 말하자면 ‘흰색 전쟁’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관중들도 될 수 있는 한 정장이나 튀지 않는 옷을 입고 입장하는 게 관례가 됐을 정도라 한다.

그런 윔블던에도 끊임없이 흰색 권위에 도전하려는 선수들의 다양한 시도로 약간의 규정을 완화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동참한 면도 있긴 하다. 엄격한 흰색 규정은 불변이면서도 유니폼의 스폰서 로고와 옷의 끝자락 그리고 손목이나 헤어밴드와 같은 액세서리에만 컬러를 허용했고 더 나아가 2007년에 남자는 5세트, 여자는 3세트로 치르는 경기 시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남녀 선수들에게 동일한 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 등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하나의 성(姓) 장벽을 허물었다. 다름 아닌 남녀 호칭을 다르게 적용하는 전통을 철폐한 것이다. 그 동안 남자 선수는 ‘Mr’를 붙이지 않고 그냥 성(姓)만 부르는 데 반해, 여자 선수의 경우 결혼 여부에 따라 ‘Miss’ 또는 ‘Mrs’를 붙였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2018년 ‘테니스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가 결혼 후 처음으로 윔블던에 출전하면서 남편 성(姓)을 쓰지 않고 자신의 성(姓)을 썼다. 윔블던 심판은 그녀를 ‘미시즈 윌리엄스’라 불렀다. 메이든 네임에 기혼자 호칭을 사용하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된 거다.

이를 두고 ‘다문화 사회에서 고립된 이벤트’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어찌 보면 변화 속에서도 전통을 지키려는 윔블던의 노력은 오늘날 개성 없이 모든 게 비슷해져 가는 시류와 차별화를 두려는 안간힘이 아닐런지.

그래서 흔히 스포츠가 삶에 비유되는데 테니스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애거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테니스는 인생의 축소판 같다. 테니스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Love, Break, Service, Advantage 그리고 Fault 등 모두가 삶 속에도 그대로 있다’고. 어쨌든 박수를 보낸다.

* 김학천 필자는 2010년 한맥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서울대와 USC 치대, 링컨대 법대를 졸업하고, 재미한인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온타리오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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