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퀴팅(조용한 퇴직, quiet quitting)’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갤럽에 의하면, 미국 직장의 최소 50%는 “승진할 생각도 없고 일을 더 많이 할 생각도 없고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32%만이 “적극적으로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나쁜 직원이 아니라 나쁜 상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더 많이 일하면 우리는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우리가 더 높은 평가를 받을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문화와 신앙에 관해 매우 중요한 무엇을 밝혀 준다.

수세대에 걸쳐, 재정적, 물질적 잣대로 측정되는 성취와 번영은 우리 세속 사회에서 성공의 정의였다. 그러나 최근 목적으로 가는 이 좁은길이 막다른 곳에 부딪혔다. 실업률은 역사적으로 낮았지만, 올해 초 소비자 심리 역시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놀랍게도 소비자들은 지금보다 팬데믹 초기에 더 낙관적이었다. 지금 약물 남용, 우울증, 불안 및 자살 충동의 비율이 증가했다. 더 많이 얻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많은 이들이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이들은 ‘꿈“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 5명 중 4명은 은퇴할 때에 자신의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현실로 드러나는 두려움이다. 

많은 근로자, 특히 젊은 근로자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고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나쁜 소식이다. 

애플 기업이 9월 7일, 새로운 아이폰과 애플 워치 및 에어팟과 함께 최신 기술을 소개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카드 크기의 기기를 통해 50억여 명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문자 그대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엔지니어들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들이 직장에서 그저 버틸 만큼만 일하지 않은 것이 고맙다.

최근 나는 척추 수술을 받았다. 내 요추 4개가 나사로 고정되어 연결되었다. 나는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의학적 탁월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모른다. 그러나 수술을 담당한 의료진이 직장에서 그저 버틸 만큼만 일하지 않은 것이 고맙다. 

우수한 크리스천 변호사들은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바쁘게 일했다. 한 판사는 미시간 대학(디트로이트의 웨인 주립대)이 기독교인만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기독교 클럽을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연방 지방 법원은 사진작가에게 동성 결혼식 촬영을 강요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연방 항소 법원은 미국 정부가 부담적정보험법(일명 오바마케어, Affordable Care Act) 에 따른 낙태 혹은 성전환 수술을 기독교 의료단체나 의료 제공자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또 미 항소 법원은 원치 않는 성 정체성 혼란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미성년자에게 자발적인 대화 요법을 제공하는 면허 있는 상담사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나는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는 변호사들이 직장에서 그저 버틸 만큼만 일하지 않아서 고맙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덕 있는 삶을 살고 섬길 것을 분명하게 요구한다.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 

그런데 에스켈 1장을 읽다가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지자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었다(겔 1:28). 그 결과로 나온 비전과 예언이 에스겔서가 되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에스겔과 유사한 체험을 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계 1:17). 그는 받은 비전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다(사 6:1). 그리고 이사야는 말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 그런데 그의 입술이 정화되었고(7절),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세상으로 보내졌다. 그 결과가 이사야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엎드러질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도록 덕과 열정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은 예배가 선교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칭찬할 수 없다.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찬양할 수 없다. 예배가 선교의 연료이자 목적이다.“라고 존 파이퍼는 말했다. 
 
달리 말해, 기독교인은 우리의 일에 대한 헌신으로 예배(경배)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의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마 22:37-39).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더 많이 압도될수록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능력을 받을 것이다(골 3:23).

사제이자 시인인 Geoffrey Anketell Studdert-Kennedy(1883-1929)가 우리의 최선의 응답이 무엇인지 이 찬송가로 들려 준다. 

(...)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준 것을
주고 주고 또 주고
대가를 계산하지 말고 그대 자신까지 내주고
현존하는 온 세상, 
그리고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올바르고 영광스럽게 섬기고

(*편집자 주-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9월 8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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