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에 서명하는 개빈 뉴솝 캘리포니아 주지사
법안에 서명하는 개빈 뉴솜 캘리포니아 주지사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영부인이 10월 3일에 푸에르토리코, 12일에 플로리다를 방문한다. 허리케인 이안 피해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3일 오전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는 87명으로 확인되었으나,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라 예상된다.
 
한편 우리나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문화적 폭풍이 일고 있다.
 
100일 전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건 생명을 위한 역사적 승리였다. 그러나  “문화 전쟁”이 집으로 오고 있다. 주 및 지역 사회들은 전례 없는 수준에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도덕적 이슈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몇 가지 사례들을 생각해 보자.

9월 29일, 개빈 뉴솜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SB 107 법안에 서명했다. 데이비드 프렌치는 이렇게 새 법을 설명한다. “한 아동이 젠더 긍정(gender-affirming) 건강 관리와 젠더 긍정 정신건강 관리를 받기 위해 다른 주로 갈 수 있으며, 아동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부모의 노력을 즉시 막을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당신의 자녀가 성전환 수술을 받으러 캘리포니아 주로 일단 넘어가면, 부모로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녀 수술에 관한 정보조차 부모가 받을 수 없다는 법이다. 

이는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 가족과 전통적인 도덕을 뒤집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위스콘신 교육위원회는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성 정체성에 관한 수업을 하기 위한 성교육 커리큘럼을 진행하고 있다. 뉴저지 법은 학교에서 LGBTQ 역사를 의무적으로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뉴저지 교육부는 성행위에 관해 중학생에게 가르치도록 성교육 기준을 학교에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기독교계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연합감리교단 소속 지역 교회 다수는 성경적 전통성을 지키고 있지만, 많은 교회들이 그 어느 때보다 LGBTQ 이데올로기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 미국장로교회와 성공회,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와 많은 주류 교단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심지어 침례교회 일부도 성경적인 성보다 LGBTQ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다. 

당신이 성경적 도덕을 옹호한다면 사회의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대법원은 낙태 판결을 한 이후 지지율이 기록적으로 떨어졌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속적인 응답을 해야 할까?

세속적인 사람들은 성경적 논증으로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리스의 논리를 채택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을 인용한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행 17:22-31), 우리는 설득 대상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성경적 도덕을 반대하는 세속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논리로 시작하자.

“젠더 긍정” 치료를 원하는 자녀를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캘리포니아 주의 새로운 법 지지자들에게 이러한 치료를 반대하는 부모는 자녀를 학대하는 것이다. 낙태 지지자들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생식의 자유”를 부인함으로써 여성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믿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미국인은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인종 간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차별적이라고 믿는다. 오늘날 LGBTQ의 권리는 다른 소수자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유효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제 세속적인 도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세속적인 증거를 사용하자.  일례로, “성적 자유” 운동의 결과 중 하나는 매독과 같은 성병의 급증이다.

19~64세 미국 성인은 모두 불안 검사를 받으라는 연방 정부의 권고가 나온 뒤, 월스트리트저널의 헤드라인 제목은 “다음 팬데믹: 삶자체에 대한 불안”이었다. 2021년 한 설문조사는 미국인의 49%가 세계의 상황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2009년 설문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당신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세상은 어떻게 알까? 우리가 가진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해야만 한다.
 
새 차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새 차를 원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광고주들은 무지 노력한다. 광고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차에 만족할 것이다. 영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빈 공간"이 우리의 주님께로 끌릴 것이다. 

어떻게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러한 삶이 성서적이고 논리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요 15:5), 성령이 우리의 삶을 주관한다면(엡 5:18),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좀더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롬 8:29).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 만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 당신을 만나는 사람이 당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편집자 주: 문화사역자 짐 데니슨 박사의 10월 3일 칼럼 번역)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