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하는 자의 말씀 묵상 4

박준형 목사(캐나다)


신구약을 통틀어 ‘분별(discern)’이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북미 신학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새로 개정된 표준역(NRSV)’ 성경에 의하면, 히브리어 구약에 24회, 그리스어 신약에 7회 정도 나오는 게 전부이다. 히브리어로 분별은 ‘빈(byn)’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총 24회 중 15회). 그 뜻은 ‘이해하다, 보다(see), 주의하다, 고려하다, 조사하다’ 정도로 이해된다. 신약에서는, 분별에 관한 최고의 말씀인 로마서 12:2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의미의  ‘도키마쏘(dokimazo)’나 ‘영들의 분별’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고전 12:1의 ‘디아크리시스(diacrisis- 후 영어의 discrimination-구분/차별이라는 의미로 발전)나 고전 2:14에서 ‘영적으로만 분별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아나크리노(anakrino)가 대표적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사용 빈도가 많지 않다고 해서 그 의미가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별이라는 말은 여러 다른 표현으로 확장되고 변용되어 성경 전체에서 대단히 포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나 ‘명철’이나 ‘지식’ 등의 표현들도 모두 분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구약의 솔로몬 왕이 구했던 ‘지혜와 총명과 넓은 마음(열상 4:29)’에서 ‘총명’은 분별을 의미하는 또 다른 히브리어 표현인 ‘트(터)부나’를 사용하고 있다.
 
성경 전체적으로  ‘분별’의 강조나 강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문자적으로 직접 말씀하신 바가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왜 분별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시지 않았을까? 신약에서 사용된 총 7회의 ‘분별’이라는 표현은 전부 사도 바울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께서는 ‘분별’이라는 말 대신 ‘해석(interpret)’이란 표현을 단 한번 사용하셨다(마 16:3; 눅 12: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여기서‘분간(dokimazo)’의 의미와 앞에서 말한 분별의 의미는 사실 원어적으로는 같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분간, 분변, 분별을 혼용하고 있다.
 
그러니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 단 한번 분별에 대해서 문자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때, 이 세상, 이 시대의 분별에 대해서’ 말이다. 예수님의 분별에 대한 언급이 마태복음에서 무려 3장을 할애한 산상에서의 강화/수훈처럼 장황하고 반복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중요도가 미미하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예수님께 분별이란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총체적인 삶 그 자체로서의 분별은,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교회를 위해 구체적으로 연습되고 평가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징조에 대한 분별이란 무엇인가? 

2018년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신년 메시지는 예년의 것과 달랐다. 그는 기분 좋은 위로용 멘트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찬사를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찍힌 영아로 보이는 숨진 동생을 업은 소년이 화장터 앞에서 장례 순서를 기다리며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섬뜩한 사진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전쟁의 결과’였다.

모두가 "대박 나세요"를 외치는 신년 초의 흥분된 분위기에 그는 다시는 꺼내 보고 싶지 않은 칙칙한 사진 한 장을 전 세계에 공개함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이게 너희들이 좋아하는 폭력과 전쟁의 결과야? 누가 이렇게 했어? 바로 우리들이야!”라면서.

그는 늘 ‘우리의 시대적 분별’을 강조해 왔다. 시대적 분별을 통해 성숙하고 깊어지는 교인이 되라고, 나아가 믿음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단위 공동체로, 사회로, 국가로 확대하고 진보하라고 권면해 왔다.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은 무엇인가? 현 시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주의(主義)’ - 개인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연령주의, 남성중심주의, 우월주의, 차별주의…)들을 여기서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주의들이 우리들의 신앙을 이뤄가는 데 어떤 방해와 위협이 되어 왔는가? 이것뿐일까? 21세기의 영성가인 리처드 포스터가 ‘21세기의 가장 큰 저주는 피상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런 시대적인 피상성의 진부함을 초월해 영적으로 더 깊고 성숙한 경지의 신앙 및 관계로 발전하고 있을까? 

분별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그런 징조에 대항해서 역으로 살아내는 것은, 교황이나 담임목사의 몫이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다. 이건 각 성도의 급진적인 자각과 분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동)시대를 살피고 분별하고 대항하는 것은 어느 날 하나님 잘 믿었다고, 목사님 말씀 잘 들었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언제나 무엇이든지 분별하려는 꼼꼼한 각성과 각오의 결과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는 교회에 모여 기도와 예배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믿기에는, 세상이 이미 우리 교회의 문턱을 넘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인의 삶, 교회의 운영, 사역자들의 신학 등 모든 것이 세상의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

교회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세상과 담을 쌓은 섬 같은 교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아니 그건 교회가 아니다. 또 하나의 사교 집단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핵심인 ‘성육신’을 다시 고민해 보자. 신이 인간이 되어 죄 많은 세상에 오셨다! 교회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성육화하려면 죄인을 위해, 죄 많은 세상으로 ‘자진해서’ ‘문턱을 넘어’ 전진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의 무리에 합세해 더 큰 죄의 권세를 누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종속되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분별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사인에 대해 무심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집회서 4:20(공동번역)의 말씀처럼, 시대를 잘 살펴서 악을 경계하되 너무 소심하면 안 된다. 세상의 일에 거룩한 심정으로 간섭하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복잡다단한 21세기에 예수님의 제자로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장 시대의 순종의 미덕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내가 속해 있는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중에 ‘How can we be silent(어떻게 우리가 조용할 수 있지?)’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고 어둠에 속한 ‘세상’에 빛을 가져오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조용할 수 있지? 온 나라를 향해 예수님이 정의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조용할 수 있지? 우리 안에서 불 같은 뜨거움으로 말씀하시는 성령을 그 무엇으로도 소멸할 수 없어.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조용할 수 있지?” 

여러분, (시대를 분별함으로) 날마다 해마다 더욱 시끄러워지자! 소심하지 말자! 성령의 주체할 수 없는 자극으로 입을 열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세상에 외치자.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시대와 세상의 불의와 왜곡과 차별과 폭력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진실을 토해내고 같은 뜻을 가진 자들과 연대하고 일치하자. 거룩하고 우주적인 신앙을 한 개인, 한 교회에 가두지 말자(오, 이게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다.).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공헌하는 (위대한) 개인과 교회가 되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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