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패배를 각오하고 
끝까지 나아간다면,
누가 아는가 
새 희망의 시작일지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이다. 페친이 올리는 그의 짧은 시들을 매일 읽는다. 오늘은 그의 글을 조금 바꾸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글의 주제로 삼았다. 첫 부분, “패배를 각오하고”를 “패배한 후에도”로 바꾸면 어떨까. 패배한 후에는 희망이 없을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내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내 성공은 하나님의 실패로 이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영적 세계의 실상일지도 모른다. 

실패할 때마다 실패를 통해 배운다. 성공했으면 배우지 못했을 것들을 실패를 통해 배우고 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의 역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영적인 세계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마르바 던과 스탠리 하우어워스이다.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이다. 특히 마르바 던과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수이지만 하인리히 아놀드는 평범한 아니 보통 이하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가장 영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의 조카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그 책의 제목을 『A homage to a broken man』이라 명명했다. 그는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서졌고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 그가 영적으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이나 편지는 그대로 책이 되었다. 그가 broken man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인물은 바울 사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바울 사도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하거나 겸손한 척하는 데 사용한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가 불랙코미디의 장으로 전락한 것은 이 분명한 성공과 실패의 역설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정반대의 길로 치닫고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면 믿음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정반대의 신학이 자리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사람들을 존경하고 추앙하는가. 성공한 사람들이다. 대형교회 목사들과 박사들이다. 그것이 아니어도 확실한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 하셨고,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약해진 사람이 있는가.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가. 다시 바울의 모습을 보라.

“우리는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이 있는가. 정반대의 모습 아닌가.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이전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호의호식하며 과거의 가난을 자랑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라진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범접할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이 되어 아무도 그분의 길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교가 되었고, 하나님은 허울뿐인 립 서비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참람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가.

참람한 현실이란 호의호식하는 성직자들이며, 굶주리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지배 속에서 안주하는 평신도라는 사실을 왜 보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바울 사도가 말한 약함의 신학과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마더 테레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도 노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분이 살아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다며 병원에 모셔다 놓아도 일어설 수 있는 기력만 찾으면 한사코 병원에서 나왔다. 자신만 그런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지향했던 것이 무엇인가. 쓰레기와 찌꺼기이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하인리히 아놀드가 어떻게 영적인 인물이 되었는가. 모진 고통과 연속되는 실패가 그를 영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박노해의 '걷는 독서'를 이렇게 바꾸고 싶다.

패배한 후에도 
끝까지 나아간다면,
비로소 
새 희망이 시작된다.

약자의 변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자의 깨달음이며 감사의 눈물이다. 내게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이다. 예수님의 실패가 하나님의 성공이라는 이 역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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