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정치, 그리고 부흥

지난 호에서 언급한 ‘소저너 Sojourners’ 창립자 월리스는 윌버포스가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의 아들이며, 또 윌버포스에게 소명감을 불러일으킨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가 뉴턴 역시 부흥운동의 아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몇 번의 좌절에도 절망하지 않도록 존 웨슬레가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미국의 노예해방 운동의 뿌리 역시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있으며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마틴 루터 킹 등도 마찬가지였다고 언급하면서 결국 신앙인에게 신앙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강조한다.

정치인 윌버포스는 신앙인 윌버포스와 분리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앙인 윌버포스가 있었기에 정치인 윌버포스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발휘될 수 있었다. 그가 외친 정의와 진리는 곧 그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숱한 모함과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영화의 의미를 ‘정의를 위한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요약한 월리스의 통찰에 동의한다.
기독교 영화비평의 가능성이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는 최근, 이러한 해석적 지평이 의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다만 영화에 대한 비평에 그치지 않고 신학적 비전을 통해 오늘 우리 세상의 변혁을 지향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욱이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요란한 행사만 있을 뿐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때에,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서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당시의 부흥운동은 곧 사회개혁 운동과 직결되었다. 신앙의 고백이 삶의 실천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증거에서도 발견되는 교회공동체의 특징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의 비난과 오해가 극심한 이유는 기독교인의 삶이 기독교 신앙의 고백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인, 경제인, 학자, 전문인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 지도층들은 신앙의 양심이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서기 보다는 개인적 이익이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지는 않는지 질문한다.

지난 7월 보도된 어느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종교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런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이토록 비난과 질책을 받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그 영향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윌버포스의 열정과 신념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다만 그가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는 자신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타인과 약자를 위한 정치, 곧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정치였던 것이다.
윌버포스의 신앙을 지나치게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의 삶의 원동력이 신앙에 있음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 이 영화의 영화적 미덕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형식적인 종교행위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실천적 행위로 증명되어야만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인이 있어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치인, 기업인이 있어 한없이 지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과 신앙의 소명을 온전히 하나로 실천하는 한 인물을 만난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그립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간절히 그립다. 오는 10월 1일부터 진행되는 ‘제 5회 서울기독교영화제(www.sc-ff.org)’에서 상영되는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에서 이러한 소망을 발견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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