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 도는 일상에 치여 매년 찾아오는 고난 주간도 판박이 같은 절기로 느껴지던 날에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집었다. 미국의 목사이자 작가였던 찰스 M. 쉘돈(1857-1946)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s)>였다. 실직한 인쇄공을 가장하여 거리를 헤매는 동안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냉대와 무관심에 충격을 받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신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쓴 소설이라 했다. 2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이 소설의 주제는 바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이다. 주인공 맥스웰 목사는 주일예배 중에 1년 동안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 다음 그 해답에 따라서, 즉 예수님께서 하시리라고 짐작되는 그대로 행하겠다고 서약할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되며,  이후의 실천 과정과 변화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책을 펴든 순간부터 언제 어디서나 책 제목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기도할수록 내 안에 숨어 있는 거짓과 위선의 가시가 양심을 찔러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주인공 목사의 설교가 생각거리가 될 것 같아 옮겨본다. (KIM)

...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금은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지만 부자 청년은 그와 같은 고난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고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청년은 그만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 청년은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희생을 당하면서까지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오늘날의 교회,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교회가 물리적인 희생과 일시적인 손해와 고난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지난 주 복지관 모임에서 어느 노동 운동가는 사회 개혁과 구원을 위해 교회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와 같은 주장을 했겠습니까? 확실히 그의 주장은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필요와 죄보다는 자신들의 부와 안락을 더 많이 생각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 운동가의 말이 사실입니까? 크리스천들은 과연 자신들의 제자도를 시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부를 시험해서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 방식대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크리스천 제자도의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늘날 이 자리에 계시다면 여러분중 일부에게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대로 재산을 포기하고 문자 그대로 그분을 따르라고 명령하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구세주보다 자신의 부에 더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그와 같이 명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자원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부의 문제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수님이 과연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무마시켜 주기 위해 약간의 돈을 헌금하시면서 그보다 열 배 이상 더 많은 돈을 개인적인 사치와 쾌락에 낭비하는 삶을 사실까요?
예수님은 돈을 벌 때 어떤 원칙을 지키실까요? 자신의 건물을 술집이나 다른 죄악의 소굴에 임대해 주고 임대료를 받으실까요? ... 예수님이 우리 시대의 산업 현장에 내려오셔서 기업가들이 아는 모든 사실을 목격하실 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무런 말씀과 행동도 하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그분의 제자라면 이런 질문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자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고 명령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시대의 기독교는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과연 삶의 안락함과 편안함, 그리고 부를 희생하면서 스스로를 부인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개인적인 희생보다 더 절실한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선교단체를 세우고 극빈자의 짐을 약간 덜어주었다고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는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천만 달러 가진 사람이 자선금으로 일만 달러 헌금한 것이 희생입니까? 정말로 오늘날 대부분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진정 희생다운 희생은 하지 않은 채 편안하고 안락하고 이기적 삶만을 산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크리스천 제자도의 삶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개인적 차원입니다. ‘개인적으로 직접 가져다 주지 않은 선물은 속빈 강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리인을 통해 고통에 동참하겠다는 발상은 그리스도 정신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예수님의 개인적인 희생의 본을 따라 그분의 발자취를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예수님 시대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길은 동일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제자도, 즉 초대교회의 단순하고 공동체적인 모습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는 새로운 삶입니다. 오직 이와 같은 제자도의 삶만이 이 시대의 파괴적인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거의 이름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더욱 진정한 기독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기독교 부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제자도의 삶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진실하게 다음과 같은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우리가 만약 이런 찬양을 진실되게 부를 수 있다면 제자도의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단순히 예배의 특권을 누리고,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남에게 관대하며, 재미있는 오락거리와 안락한 환경에 싸여 세상의 큰 죄악과 고통을 부담스러워하며 외면하는 삶이라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우리가 정의하는 기독교라고 한다면 확실히 우리는 잃어버린 인간들을 위해 신음과 눈물, 그리고 고통의 흐느낌으로 걸어가셨던, 땀이 굵은 핏방울로 변하며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주님의 발자취와는 동떨어진 길에 서는 셈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제자도의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크리스천의 정의를 다시 재고할 용의가 있습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