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싱은 한반도를 삶의 장으로 살아가는 한민족, 그중에서도 기독신앙을 가진 우리가 감당해야 할 21세기 초반의 과제를 새삼 일깨워 주는 영화다.  사실 북한과 중국 국경, 그리고 중국과 접경한 여러 지역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목숨을 건 엑소더스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 삶의 정황을 드러내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비극적인 현실을 이런 저런 이유로 외면하며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매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해결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이고, 결국 우리의 편안한 삶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 비극을 우리의 문제로 붙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놀랍게도 김태균 감독은 이러한 비극적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고 과제임을 정면으로 다루어 주었다.  그것도 사실 전달력에 있어서는 어떤 미디어보다 뛰어난 매체이지만 동시에 과장과 축소와 왜곡의 여지가 있는 영상을 통하여 이렇게 큰 문제를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신앙적 용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김 감독은 남북한의 상황을 극명하게, 때론 다소 과장되게 대비시켜 자칫 이데올로기적인 드라마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감수하면서도 뚝심 있게 현실의 모순을 강조한다.

사실 이 비극의 중심에는 모든 사태를 책임질 사람도, 뚜렷하게 원망을 쏟아 부을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중 부조리한 현실에는 이념도, 옳고 그름의 경계도 없다. 오직 삶의 불합리함과 누구 한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는 자책감이 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헤어지고 졸지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후 울면서 상여를 쫓는 소년의 막막함,  그 소년은 행방을 알 길 없는 아버지만을 생각하며 말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병든 친구를 지키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아버지를 찾아 이동한다. 친구조차 잃고 멍한 표정으로 낯선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소년이 입을 연 순간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휴대폰으로부터 흘러나올 때였다. 소년은 그때야 비로소 눈물을 터트린다. 집을 지키지 못해,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아버지. 그러나 소년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대신 오히려 집과 어머니와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 순진한 마음과 아픈 현실에 아버지 역시 오열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시사회라는 형식을 빌어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영화관계자가 처음 필자를 초청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과연 이 영화를 기독교인들이 보았을 때 문제가 없겠느냐는 염려 때문이었다.  특별히 그 분이 신경을 쓴 부분은 다음과 같은 장면이었다. 차인표씨가 열연한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듣고 너무도 괴로와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장면을 목격한 장로님이 예수님으로 위로 삼으라고 권면을 하였다.  이때 주인공은 절규하였다.  “왜 예수님은 잘 사는 대한민국에만 계시느냐고... 하나님은 이북에는 안 계시느냐!” 그리고 그가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던 쪽복음성경을 땅에 던지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영화의 중간 부분일 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신앙 없이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신앙적인 영화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화 만드느라고 너무 힘들었을 이들이 이런 장면 하나 하나에 우리 교회가 오해할까봐 염려하고 있는 그 모습이 애처로와 보이기까지 하였다.  조금 더 폭 넓은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이런 일까지 염려하게 한 것이 미안하다”고 하였다.   

크로싱을 볼 때마다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눈물을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남쪽의 우리는 나름대로 풍요하게 살고 있으면서 아직도 수많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저렇게 처절한 삶의 정황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이 아팠고, 그러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하였던 나의 이기심과 나태함이 부끄러워 가슴이 아팠다.  한 마디로 크로싱은 우리 민족이 짊어져야 할 21세기의 ‘거룩한 부담’으로의 초대이다.  이 영화를 통하여 민족의 거룩한 부담을 함께 나누어 지는 우리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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