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 금식기도를 마치던 날, 나는 ‘불평 목록’을 적어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어느 정도는 자기 의를 과시하며), ‘주님, 이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의 목록을 한번 읽어 보세요. 주님,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소서.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은 즉시 응답하셨다.‘네가 직접 목격했냐?’‘그럼요, 주님. 저는 그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다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래, 나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죽었다. 그러므로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당신이 어느 교회를 가든지, 거기에는 잘못과 부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인지가 드러난다. 진정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면, 교회 안에 부족한 점을 보면 힘을 공급해 주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죄를 보면, 더 덕스러운 사람으로 살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중보기도자들은 교회가 온전히 세워질 때까지,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2장 험담하는 악령을 내쫓음 42-43쪽)

오늘 소개하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라;  Exposing The Accuser of The Brethren!』(Francis Frangipane 지음, 김유태 옮김, 영성 운동과 책자를 소개하는 순전한 나드 펴냄)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책자 분량이라 평소 여러가지 사정으로 책 읽기가 쉽지 않은 분들도 주저하지 말고 일독해 볼 것을 권한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험담과 불평 불만이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잘 다루었다.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한 이유는, 흔히 험담과 불평 불만이 잘못되었다는 성경 말씀뿐 아니라, 험담과 불평 불만을 당하는 이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 말씀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다음 세 가지 경우에 남의 흠을 잡는다고 말한다.
첫째, ‘실제로’ 저지른 죄가 있는 경우이다. 죄에 대한 자각을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자가 틈타게 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악한 자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다.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 것에 대해 방어적이 되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역으로 지적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고치라는 뜻이다.

둘째, ‘과거’의 실수와 잘못 내려진 결정들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흠을 잡는 영은 과거의 실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것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원인이 오늘의 문제와 연결된 경우가 많지만 갈등 상황에서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도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먼저 집중하고 과거의 문제는 단계적으로 해결하도록 서로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셋째, 마지막 단계로 실질적인 비방 공세로 들어간다. 이 시점에 이르면, 공격당하는 사람의 어떠한 정당방어도 먹혀들지 않는다. 험담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문제의 죄인을 제거해야한다는 ‘한 가지 생각’에만 고착되었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게 되어 있다.

내가 속한 교회 전체 공동체, 작게는 남여전도회나 구역과 같은 부분적인 신앙 공동체는 어떤가? 교회내에 험담이 생기는 초기 단계에서 교회 리더들은 자신의 허물 때문인지 아니면 험담하는 이들의 문제인지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한다. 리더들이 부족하다면 ‘회개’하는 것이 험담과 불평 불만이라는 사탄 마귀의 역사에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이다. 그래야 문제가 커져 지금 일뿐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까지 들고 나와 점점 복잡해지고 꼬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특히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정작 문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더 큰 본질을 놓쳐 마침내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게 되는 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험담과 불평 불만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단계를 살펴보았다. 지은이는 계속해서 혹 나 자신이 험담과 불평 불만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말은 마음에서 흘러 넘쳐 나오는 것이다… 참소자를 먼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쫓아내야 한다. 흠잡기와 비난의 소리들은 용납될 수 없다. 형제, 자매들을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는 오직 사랑이 가득한 기도로 중보하는 자들에게서만 발견된다. 중보자들은 교회의 부족함을 보면 비판적이 되는 대신에, 중보기도로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장 48~56쪽)

지은이는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이나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되므로, 다른 사람에 관해서 하는 말,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을 기도드릴 때의 신앙고백처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교회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뒤에서 실제 수군거린 한 사례를 통해 험담을 당하는 경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소개한다. 교회의 성도들이 험담에 동요되고, 지은이 자신은 변명, 회개 등 모두 다 할 수 있었으나, 그 어느 것으로도 교회는 잠잠해질 수 없었다. 하나님은 지은이의 결백을 입증해 주시지 않고 대신에 지은이를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성령님은 지은이가 비평의 말에 의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보여주신 것이다. 성령님은 또한 지은이의 마음의 평안이 다른 사람들의‘인정과 거부’ 또 ‘자존심’에 얼마나 많이 의존되어 있는지도 폭로해 내셨다고 한다.

“악령의 공격을 맞이하여, 아무리 자신을 옹호하려해도 되지 않는 때가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아 자체도 썩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들이 꼬투리를 잡고 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상처를 받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그 기도를 그대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 23:24).… 모든 갈등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도록 결심하자. 일시적인 고난을 참으면 천국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거부하고, 상처받고 부들부들 떨지 않으며, 용서하지 않음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말이다. 나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최대 목표는 교회의 부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의 탄생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3장 69~71쪽)

지은이는 서문에서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고, 남의 흠집을 들추어 내는 집이 되지 않기를 갈망하고 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신앙 공동체에서 지은이의 소망이 역사하기를 기원한다. “그러므로 서로 상대방을 먹이로 삼는 대신, 서로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교우를 헐뜯는 영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면, 모든 험담의 악령은 굴복한다. ‘신적인 기억상실’이라는 것이 있다. 즉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한 죄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신다는 것이다!” (1장 24쪽)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