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십일조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아브람(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 전)과 대제사장 멜기세덱과의 관계에서 유래된다. 그가 아브람을 위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축복하자 아브람은 그 얻은 것 중에서 십분 일을 그에게 준 것이다(창 14:18-19). 이 유래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요구에서가 아닌 아브람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복 주심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자신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서 십일조가 다시 거론되지는 아니했지만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유래는 직계인 아들 이삭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고 손자인 야곱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가던 중,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베개 삼았던 돌을 가져와 기둥으로 세우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했다(창 28:18-22).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듯 그가 드리려했던 십의 하나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요구에서가 아닌 그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기인한다.
이후로는 이스라엘 종교의 원리인 십계명에는 십일조가 거론되지 아니했지만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 27:30)는 기록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이면 십의 하나를 바쳐야했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8-29)는 기록으로 보아 기업이 없거나 빈민을 위한 지원금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지원금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구호가 요청되는 대상들을 위한 비축 자금으로 성내에 굶주리는 자가 없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가 제도화되고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관리하면서 근본 목적과 정신이 사라지고 백성의 십일조가 제사장들의 몫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엘리의 두 아들인 흡니와 비느하스 같은 악덕 제사장들이 속출하면서 급기야는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호된 책망을 받는다.

그들은 백성이 좋은 것으로 골라 바친 제물은 가로채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대신 제사했으며 이를 한탄하신 하나님은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고 하셨고, “다시는 너희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 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이라고 말라기 선지자도 통분했다. 동시에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도적질하던 제사장들에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고 통탄하셨다.

십일조의 유래는 아름답게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에 대한 감사와 헌신에 기초를 둠과 동시에 억지로 하거나 부담을 느끼며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떠한 채무감에서 빚까지 얻어 드리는 일도 더더욱 아니었다. 더구나 국가 운영과 빈민 구제를 위해 세금을 내고 있는 현실에서 십일조가 교인들의 멍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동시에 십일조가 강요되어 구제가 제외된 교회 운영을 목적으로 하든지 화려한 성전 건축을 목표로 한다면 이 또한 십일조 의미에 부합된 처사일 수 없다. 금일에도 십일조의 의미가 분명하고 용처가 선명하다면 성도들은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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