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sychology in Movies

한국 대법원에서 존엄사(death with dignity)에 대해 처음 결정하고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었는데 놀랍게도 한 달여 이상 환자가 계속 살아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의학적으로 사망이니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과 육신은 기능하지 못하나 영혼은 살아 있다는 주장 사이에서 어려운 판정을 내린 것인데, 정작 환자가 계속 살아있으니 최초의 존엄사 결정 운운하는 것이며 임종 예배까지 드린 것이 멋쩍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돌보는 가족과 환자 당사자의 심정이 어떨까에 있다. 

흔히 환자를 돌보는 입장에서의 어려움만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소개하는 미국 영화『My Sister’s Keeper』는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이 잘 그려진 영화이다. 아버지는 소방서에서 일하고, 엄마는 변호사인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지는데 바로 딸이 백혈병(Leukemia)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살리기는 어렵고 딸에게 필요한 여러 장기 등을 이식해 줄 수 있는 새 아이를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 낳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오빠가 있고 백혈병 걸린 딸, 그리고 막내가 태어난 것이다.

영화는 먼저 불치병 환자를 둔 가족의 어려움을 잘 그린다. 머리를 빡빡 깎은 사춘기 딸이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자 강인한 엄마는 자신의 머리를 똑같이 깎는다. 순전히 언니를 위해 태어난 막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기 때부터 언니에게 피를 제공했는데, 이제 골수(bone marrow)를 제공할 시점이 된다.

아버지는 딸이 해변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간청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 소원을 들어주고자 한다. 그저 조용하고 침착한 모습만 보여 주던 아버지가 이번만은 자기 맘대로 하겠노라며 아내와 크게 싸울 때, 둘 다 환자를 위하는 일이기에 보는 이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다음으로 오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치병에 걸린 당사자의 마음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딸은 자신과 비슷한 병을 앓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옆에서 간호하던 엄마는 조금 미심쩍어 하지만,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던 중에 여자가 피를 토하자, 남자는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그 피를 받아낸다. 동병상련이랄까? 가족 이상으로 딸의 처지를 이해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엄마는 적이 마음이 놓인다.

두 사람은 환자들만 모이는 self support 그룹의 성격을 지닌 환우회의 댄스 파티에 함께 간다. 딸을 데려가려고 집으로 온 남자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퀭하게 다 죽어가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정장을 멋있게 차려 입었다. 드레스에다 가발을 한 딸이 이층에서 내려오는 모습 역시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열심히 춤을 추던 둘은 밖으로 달려나가 둘만의 장소에서 첫사랑을 나눈다. 날이 바뀌고 병원에서 딸이 울고 있다. 엄마가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남자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었는데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엄마와 딸은 분한 마음이 든다.

엄마가 간호사에게 따지듯 그 남자에 관해 묻자, 소식을 들은 줄 알았다며 그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민망해하며 전한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잃은 딸은 크게 상심한다.

이제 11살이 된 막내 딸은 자기 몸의 일부를 더 이상 기증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변호사에게 직접 찾아가 소송을 의뢰하면서 영화는 갈등 국면으로 치닫는다. 축구를 하고 싶고, 치어리더 활동도 하고 싶은데 신장을 주고 나면 자기 몸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소송 내용은 둘째치고, 미성년자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걸었으니 황당하기만 하다. 병원에서 딸의 소송 우편물을 받은 엄마는 참지 못하고 막내 딸의 뺨을 때린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회의를 하지만 동생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다. 오히려 동생이 신장을 주지 않으면, 언니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하는 엄마와 서로 감정만 나빠진다. 

마침내 한 가족이 원고와 피고로 법정에 서게 된다. 사실 막내 딸이 부모를 소송한 것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다. 삶을 포기하려는 언니의 부탁이 있었고, 그 방법으로 소송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미 죽음을 예견한 언니가 나머지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어쩐지 신장을 주지 않겠다는 동생과 언니의 관계는 나빠지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이 장면을 보고서 이해되었다.

또한 안절부절하면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던 모습의 큰아들이 진실을 말할 수 없어 그동안 괴로워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는 법정의 방청석에서 폭발하듯 소송의 진실을 말한다.

여기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 환자에게 헌혈 또는 신체 기관을 기증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몇 살부터 자신의 신체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사랑과 희생이 어디까지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동시에 환자 자신이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여보려는 차원에서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 초점이 된다.

‘인생수업 Life Lessons : 상실과 이별의 수업’(본 칼럼 2009년 3월 5일자 소개)이란 책으로 알려졌고 죽음에 대해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불치병에 걸려 자신이 죽게 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다음 5단계로 심경의 변화를 거친다고 말한다. 1. 부정 denial  2. 분노 anger  3. 타협 bargaining  4. 절망 depression  5. 수용 acceptance

자신만이 죽는 것이 아니고 가족 모두가 죽는 것이라며 가족들의 고통을 염려하는 영화 속 환자의 마음은 이제 5단계 ‘수용’에 이른 것이다. 다만 가족들, 특히 딸을 살려 보려는 강인한 엄마는 아직도 1단계 ‘부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불치병에 걸린 딸은 지난 삶을 정리한 앨범을 준비하며 엄마가 죽음을 수용하게끔 도와준다. 돌보는 이가 환자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가 산 자를 배려하다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6,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살아 있는 육신의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돌보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셨다.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한없이 슬프지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요한계시록 21:4)에서 말하듯 천국에 먼저 간 가족과 재회를 기약하며 이제 이 땅의 삶에 충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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