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대여점에서 날마다 영화를 빌려와 혼자 영화삼매경에 빠져 있던 막내가 엄마가 좋아할 영화라면서 <The Soloist>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솔로이스트? 독주자? 막내는 음악 관련 영화여서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무튼 음악 영화로 보자면 음악영화인 것도 맞고,  조금 특별한 홈리스를 통해 사회의 외곽지대를 조명한 영화라면 또 그 말도 맞는 그런 영화였다.

<The Soloist>는 어린 시절 음악적 재능이 풍부해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했으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중퇴하고, 집에서도 뛰쳐나와 오랜 세월 홈리스로 살아온 나타니엘 앤서니 아이어스(제이미 폭스)와  그에 대한 칼럼을 쓰고 책까지 낸 L.A. 타임즈의 스티브 로페즈 컬럼니스트(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라 한다. 로페즈의 칼럼과 그의 책 『The Soloist』에 실린 나타니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를 구성했다고 한다.

특별한 칼럼 소재를 찾아 동분서주하던 자신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던 로페즈 칼럼니스트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가 뇌 단층촬영을 받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로페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홈리스가 눈에 들어온 걸까? 한쪽 눈이 퉁퉁 부은 로페즈는 작은 공원의 베토벤 동상 앞에서 나타니엘 앤서니 아이어스라는 흑인을 발견한다. 그는 줄이 두 개밖에 없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베토벤을 좋아한다고도 했고, 유명 연주가 이름들을 들먹이는가 하면, 자신이 줄리아드 음대 출신이라고 했다. 신원 조회를 통해 그의 말이 사실인 걸 알게 된 칼럼니스트는 독주자 홈리스를 글감으로 삼아 ‘두 줄의 바이올린을 켜는 홈리스’라는 첫 칼럼을 쓴다.

로페즈는 질주하는 차들 곁에서 홀로 연주하고 있던 나타니엘에게 정상적인 삶과 연주의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다. 어느 칼럼 독자가 보내준 첼로를 미끼 삼아 나타니엘을 홈리스 시설인 LAMP에 들어가게도 하고, LAMP의 사회복지사들에게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항의도 하고, 아파트를 얻어 주기도 하고, 레슨을 받게도 하고, 그에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불러 독주회를 마련해 주려고도 하지만, 나타니엘은 반복해서 뒷걸음질치더니 끝내는 자신을 이용하는 거 아니냐며 고함치고 포악을 부린다.

나타니엘은 사람들로부터 늘 뒷걸음질쳐 왔다. 언제 자기 안의 악마가 속삭일지 알 수 없고, 언제 자신에게서 광기와 폭력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는 환청이 두려웠고,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남을 괴롭히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오직 음악을 연주할 때에만 그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나타니엘에게 몰입해 있던 로페즈는 지치고 만다. 유명 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중년의 홈리스 덕분에 칼럼니스트는 더 유명해지고, 시장으로 하여금 홈리스의 실태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어 사회복지 정책에 반영케도 했다는데, 정작 나타니엘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다는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로페즈의 전 부인은 그냥 친구가 되라고, 나타니엘이 당신을 좋아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충고해 준다.

나타니엘의 누이도 찾아온다. 누이가 만들어준 수프에 독이 들어 있다면서 수프를 누이 입에 마구 쑤셔 넣고 가출한 동생을 오랜 세월끝에 찾아온 누이는 나타니엘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동생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예전에 우리 함께 살았다는 말을...
로페즈와 전 부인, 나타니엘과 누이가 극장에 앉아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검은 화면 위로 현재 나타니엘은 스티브 로페즈가 마련해 준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첼로, 바이올린, 트럼펫 등의 다양한 악기를 다루고 있고, 로페즈는 기타를 배우는 중이며, 엘에이의 홈리스 인구는 9만 명이라는 자막이 뜬다.

제이미 팍스가 실존 인물의 음악적 감수성이나 능력을 재현하지 못했다는 비판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줄리아드 출신 홈리스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초점을 맞춘 것 같지 않다.
두 주인공을 통해 참된 우정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으며, ‘우정’이란 단어를 통해 연민이나 봉사의식, 혹은 경멸이나 무관심이 아닌,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홈리스의 세계에 들어가 보라고 관객을 초대하는 것 같다. 인종 차별, 약물 중독, 종교, 도덕, 사회복지, 법이라는 안경을 쓰고 한숨 쉬지 말고, L.A.  한 곳에만 9만 명이나 산다는 홈리스들을 이웃으로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홈리스들 다수가 실제로도 홈리스였다고 한다.

아마 내가 그곳에 간다면 그들을 촬영장의 엑스트라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 한귀퉁이에 그런 지역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다. 몇년 전 서울역이나 종로통에서 만났던 수십 명의 노숙자들도 낯설었지만, 너무도 많은 흑인, 백인 홈리스들은 낯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감이 나질 않는다. 공터와 공원, 거리에서 구걸하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벽에 기대어 초점 잃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마약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춤을 추고, 공짜 음식을 나누어 주는 트럭이 오면 줄을 서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고, 도시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홈리스들...

그들의 보증인이 되어 집을 얻어 주고 일을 구해 주는 한국 여인이 있다. 시카고에서 홈리스 교회를 이끄는 한국인 목사도 만난 적이 있다. 취재차 간 그곳에서 홈리스들의 손을 잡고 성가를 불렀다. 한국인 봉사자들은 음식과 성경책을 제공했다. 그들은 소수였고, 그들 중에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간 이들도 여러 명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상적인 생활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가 내게 던진 질문이다.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집을 차압당한 이들이 숲속에 텐트를 치거나 홈리스가 되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오는 판이니, 날씨가 따뜻한 엘에이의 홈리스 인구는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 주기도문의 응답을 가장 빨리 받는 이들이 홈리스들이라던 필립 얀시의 글이 생각난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 쓰레기통에서 반쯤 남은 피자 박스를 건지게 되고, 그들의 죄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에 회개의 기도도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했나? 
우리 동네의 미국 루테란 교회에는 깡통과 시리얼 상자 등을 진열한 방이 있다. 복도에는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그 방의 문에는 종류당 한 개씩만 가져가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신자들은 종이 봉지 한가득 식료품을 기증한다. 익명의 누군가가 그 방을 거쳐갈 것이다.

홈리스 교회 취재를 다녀온 뒤 빚진 느낌이 잊을 만하면 되살아났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로는 빚진 느낌마저 오만이라 여겨졌다. 나라면 도저히 그들과 친구될 자신이 없을 것 같다. 자칫하면 내 위선만 들킬 것 같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만 같다.
“Feed them! 잠깐만! 행동하기 전에 먼저 오만과 편견을 던져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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