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에 개봉된 한국영화‘내 사랑 내 곁에’를 꼭 보고 싶었는데, 지난 토요일 가입해둔 인터넷 영화방에 드디어 올라왔더군요. 김명민이란 배우는 영화 하나하나마다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기에, 루게릭 환자를 연기하기 위해 살을 무지 뺐다는 말에 무척이나 이 영화가 궁금했거든요.

장의사 아버지를 둔 덕에 성장 과정도 편치 않았을 텐데 결국 시신을 염하고 화장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 두 번이나 이혼 당한 아픔을 가진 하지원과 이미 루게릭 병에 걸려서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법대 출신의 김명민. 영화 속의 두 사람은 남자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만나지요. 어린 시절 초등학교 동창이었나 봅니다. 남자가 먼저 여자를 알아 보지요.
남자 어머니의 시신을 곱게 염하고 화장하고 인사까지 곱게 하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남자가 어머니의 유골함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여자에게 건넵니다. 내 곁을 지켜줄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염도 하고 화장도 해주지 않겠느냐고, 속으로는 간절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하게 물어 봅니다.
사람들이 시신을 만지는 자신의 손을 무서워하고 더럽게 여기는데 괜찮겠느냐고 여자가 묻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은 누구라도 연상할 수 있는 장면들로 이어집니다. 병을 고쳐서 사법고시도 보고 여자와 사랑하기 위해 남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침술 치료를 받아도 보고... 텅 빈 어느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고 반지도 교환하고... 남자를 치료하려고 엉터리 침쟁이를 찾았다가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여자는 어쩔 줄 모르고... 루게릭 병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서서히 남자의 몸을 마비시키고...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 보려고, 어떻게든 결혼 신고를 하려고 여자는 노력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굴레를 씌우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뇌가 죽어가는 병이기에 감정 조절도 잘 되지 않는다지만, 여자를 떠나 보내려고 남자는 폭언을 하고 모질게 굴기도 하고... 화가 난 여자는 남자를 떠나는데, 자신의 손과 발을 묶어 놓고 남자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래도 그래도 서로 사랑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랑 멈추지 않고... 혼수 상태의 남자 손가락에다가 인주를 묻혀 결혼신고서에 찍는 순간 남자는 숨을 거두고... 여자의 눈물과 남자의 눈물은 죽음 이후에도 교차되어 흐릅니다.
혼수상태여도 살아 있기만을 간구하는 여자의 울음,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남자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에 어느새 내 마음도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영화‘내 사랑 내 곁에’는 서로의 아픔을 받아들인 남자와 여자의 순애보 영화이기도 했지만, 식물인간, 전신마비 등의 이유로 병실에 있는 장기 중환자들을 통해 존엄사의 문제를 제기한 영화인 것도 같았습니다.
직장도 그만두고 돈도 다 날렸건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형을 간호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 안락사를 요구하는 동생이 있고, 병실에서 아예 같이 살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늙은 아내와 중년의 남편도 있습니다. 날마다 부인의 얼굴에 팩도 해주고 가발을 씌우고, 웨딩 드레스나 예쁜 옷을 갈아 입히는 지극정성의 남편입니다.
늙은 아내가 하지원에게 그러지요. 이 세상에 가장 먹기 힘든 것이 마음이고, 가장 버리기 힘든 게 욕심이고, 가장 배우기 힘든 게 잘 사는 기술이라고요.
하지원은 또 그러지요. 죽어가는 사람인 줄 알고 사랑했는데, 그래서 오늘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내일을 생각한다고...
오늘 읽은 어느 칼럼에선 또 그러더군요.‘이웃이라는 게 뭐냐, 자유인이 자유의사로 선택하는 존재예요. 그때 내 이웃은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운명도 아니고 제도나 물질에 의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그냥 사람으로서 어느 사람을 선택하는 그때 그가 내 이웃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의 영화에서 김명민과 하지원이 보여준 선택도 그 범주에 들어가겠지요.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다지 울지 않았는데 영화가 끝나자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임종도 못 보고 투병 과정도 지켜 보지 못해 그저 막연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오늘 감상한 영화 속 병실의 환자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거였어요. 김명민이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읊조리듯이, 저 역시 죄송하다는 말을 자꾸 마음으로 되뇌이게 되더군요.

눈물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잔상이 뇌리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엄마와 약속한 토요일 밤 11시에 서울로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젖어 있었습니다. “엄마, 서울 어딘가에서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한 사람도 있고, 비상시에 돌보아 주겠다는 사람도 있으니 혼자라고 섭섭해 하지 말아”하고 달랬더니“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너야.”라고 울먹이셨지요.
그 울음에 전염될까봐 재빨리 엄마의 말을 가로챘습니다.“엄마, 울고 싶으면 기도방에 가서 울고, 소원이 있으면 기도방에 가서 하나님에게 부탁해. 제발 주변 사람 때문에 서운해하지 말고 제발 나 때문에 울지 말아. 엄마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미국에도 빨리 오게 될 것이고, 좋은 일이 생겨날 거야. 엄마에게 기적이 일어날 거야. 알았지요?”

미처 전화카드를 사두지 않아 프로모션 카드로 걸었더니, 이 말 끝나기 무섭게 전화 연결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토요일 밤마다 아기처럼 훌쩍이시는 팔순 엄마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자책감에 기어이 제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영화 속 착한 사람들의 말이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습니다. 의식이 없어도 내 사랑 내 곁에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구요. 엄마의 소원도 그런 거라구요.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